4박 5일 {西安|시안} 여행의 2일차 기행이다.
어제는 {旅毒|여독}에 씻지도 않고 곤히 잠들었기에 이날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꽃의 서울」이 아니라 「돌의 서울」이라 일컬을 만한 {碑林|비림}, {玄奘|현장}의 {佛德|불덕} 높은 {大慈恩寺|대자은사}의 {大雁塔|대안탑}, 그리고 {盛唐|성당} 시기의 찬란한 {長安|장안} 문화를 재현한 테마파크인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을 방문하였다. 개인 정비를 마치고 {碑林博物館|비림박물관}의 개관 시간에 맞춰 9시경에 호텔을 떠나 나섰다.
{碑林區|베이린구}에 위치한 호텔에서 {碑林博物館|비림박물관}까지는 도보로 10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書院門|수위안먼} 거리 근처에 있는 {文物天地|문물천지}를 지나자, 온갖 {文房具|문방구}와 {骨董|골동}을 취급하는 점포들이 아침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팔지 않고 곧바로 {碑林|비림}박물관을 향했다.
비림박물관
시안성벽의 {魁星樓|괴성루}가 바라보이는 {東門|동문}을 통해 {碑林|비림}박물관에 입장했다. 입장권은 10元으로 저렴하다. {東門|동문}에는 「{歡度春節|환두춘제}」라고 적힌 거대한 홍색 현수막이 나를 반겨주었다.
비림박물관은 남북으로 길쭉한 부지 위에 오랜 세월 동안 개축되며 현재에 이른다. 개찰구를 지나면 정면에는 비석이 놓인 정자가 보이며 서쪽에는 기획전시실이 있고 동쪽에는 기념품 상점이 있다. 나는 기획전시부터 관람하기로 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館內圖|관내도}를 그래픽으로 제작하였다.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의 제목은 「{石墨鎸華|석목전화}」로, 비림박물관이 소장하는 {名碑|명비}의 탁본을 떠서 {表具|표구}한 것을 전시하였다. {碑林|비림}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 수장하는 비석의 목록도 {豪華一色|호화일색}이다. {北宋代|북송대} 1087년에 처음 건립된 {碑林|비림}은 9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王羲之|왕희지}・{顔眞卿|안진경} 등 전설적인 서예가의 손을 거친 작품을 포함하여 {漢代|한대}부터 {近現代|근현대}까지의 비석과 {墓誌|묘지}를 4천 점 넘게 수장하였다. 높게 솟은 비석이 4천 점이나 되니 가히 「비석의 숲」이라는 호칭과 명실상부하다. {中華|중화} 문명의 {原典|원전}을 담은 경이로운 『{開成石經|개성석경}』을 시작으로, {秦始皇帝|진 시황제}가 당시 {小篆|소전}으로 새긴 『{嶧山刻石|역산각석}』의 탁본, {後漢代|후한대} {隷書|예서}로 새긴 『{曹全碑|조전비}』, {唐代|당대} 중국에서 기독교가 성행한 역사를 새긴 『{大秦|대진}{景敎|경교}{流行|유행}{中國|중국}{碑|비}』 등 저명한 비석은 물론, 이름 날린 명필가들의 글씨가 모여 있는 서예의 성지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비림박물관의 역사를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淸末|청말} {文廟|문묘}(즉 {孔子祠堂|공자사당}) 내에 있던 {碑林|비림}은 1912년에 {陝西圖書館|산시도서관} 관할 하에 들어가 1938년에는 {陝西省|산시성} 시안비림관리위원회가 관리했다. 1944년에는 비림을 바탕으로 {陝西省|산시성}역사박물관이 개설되었고, 1950년에 {西北|시베이}역사{陳列館|진열관}, 1952년에 {西北|시베이}역사박물관으로 차례로 개칭, 1955년에는 {陝西省|산시성}박물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陝西|산시}역사박물관이 따로 개관하면서 오늘날의 시안비림박물관으로 독립되어 이어진다(村松, 2020:141). 앞서 「{鐘樓東遷歌|종루동천가}」에서 보았던 {景雲鐘|경운종}은 1950년대에 {碑林|비림}으로 이설되어 현재도 안치되어 있다.
내가 특히 흥미깊게 본 탁본은 소위 『{景敎碑|경교비}』이다. {西安|시안}에서 출토된 가장 유명한 비석인 『{景敎碑|경교비}』는 실크로드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비석이기도 하다. {碑面|비면}에는 {漢文|한문} {銘文|명문}과 더불어 에스트랑겔로{體|체} 시리아{文|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위의 사진으로 말하자면 {漢文|한문} 명문의 「{眞主|진주}{阿羅訶|아라하}」와 「{十字|십자}」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오늘날 중국어에서 「{眞主|진주}」는 이슬람교의 맥락에서 유일신을 가리키는 용법이 일반적인데, 「{阿羅訶|아라하}」와 「알라」는 {同源語|동원어}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던 중, 탁본에 적힌 비석 원문을 보고 술술 소리내어 읊는 {現地人|현지인}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自國|자국}의 역사 문화를 진정으로 {珍重|진중}하는 자는 문화재를 피상적으로 보기에 그치지 않고 그 본질을 파악하려 애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큐레이터가 작성한 짧은 설명문을 읽을 때와 {原文|원문}을 직접 읽을 때에 보이는 깊이는 {天壤之差|천양지차}이다. {我國|아국} 사람은 자국 문화재를 보고도 {漢盲|까막눈}이 되기 십상이라 낫 놓고 기역{字|자}도 몰라하는데, 어찌 {我國|아국}의 문화적 퇴보를 한탄스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기회전시 관람을 마치고 {戟門|극문}을 지나 나오니 상징적인 {孝經亭|효경정}이 나를 맞아주었다. {樓閣|누각}에 둘러싸인 『{孝經|효경}』 비석은 745년에 {唐玄宗|당 현종}이 {序文|서문}을 짓고 주석을 단 것이다.
제1실
제1실은 열두 가지 {儒家經典|유가경전}(즉 {十三經|13경}에서 『{孟子|맹자}』를 제외한)을 {石刻|석각}한 『{開成石經|개성석경}』만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唐|당} {開成|개성} 연간에 새겨진 이 거대한 {石經|석경}은 모두 114{基|기}, 228면, 65만여 글자로 구성된다. {唐代|당대}에 성립한 비석답게 {唐太宗|당 태종} {李世民|이세민}의 「{民|민}」이 피휘되어 {缺字|결자}로 새겨진 것이 눈에 띄었다.
순로대로 관람할 경우 『{周易|주역}』『{尙書|상서}』『{詩經|시경}』『{周禮|주례}』『{儀禮|의례}』『{禮記|예기}』『{五經文字|오경문자}』『{九經字樣|구경자양}』『{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春秋公羊傳|춘추공양전}』『{春秋穀梁傳|춘추곡량전}』『{孝經|효경}』『{論語|논어}』『{爾雅|이아}』 순으로 보게 된다. 비석 스스로가 장대한 벽이 되어 관람로를 이루는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서법이 아름다워 중국 고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 뜻깊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내 시선을 끈 것은 『{周易|주역}』의 {六十四卦|64괘}를 하나하나 돌에 새긴 정성이다.
제6실
단숨에 제6실로 넘어가서, {碑林|비림}의 모든 비석 중에 가장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元代|원대} 『{府學公據|부학공거}{及|및}{重立文廟|중립문묘}{諸碑記|제비기}』이다. 이 비석의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은 팍빠문자 한 구절의 존재와 {落款|낙관} {年月日|연월일}의 독특한 서체 양식이다. 일행이 ꡮꡞꡃ ꡊꡜꡞꡭ ꡈꡃ ꡭꡞꡋ ꡉꡟ ꡙ ‹šiŋ dhiy taŋ yin tʼu la›로 판독해낸 팍빠문자 구절을 귀국 후 조사해본바, {照那斯圖|조나스토}・{羅烏蘭|뤄우란}(2008)이 일찍이 「{成德堂|성덕당}을 위하여[반포한 {公據|공거}]」의 뜻으로 해석해놓았다. 5일차에 항공편으로 귀국하는 도중에, 일행은 『{蒙古字韻|몽고자운}』 연구를 찾아보며 팍빠문자 -hi-가 [ə] 발음을 나타내는 표기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나는 이를 통해 첫 세 글자는 {聖德堂|성덕당}이 아닐까 짐작하였다. 근고음에서 [təj]는 德·得 정도밖에 없는 아주 특징적인 음절인 탓에 쉽게 특정이 가능했으나, 첫 글자의 경우 {韻尾|운미}를 갖는 {常母|상모} 음절은 {遼代|요대}에 이미 {聲母|성모}가 유기 파찰음으로 변화한 정황을 고려하여 {成|성} 따위의 글자는 논외로 여긴 것이 {敗因|패인}이 되었다. =yin tula는 몽골어에서 「~때문에・~를 위해」의 의미이다.
{蒙文|몽문} 좌측의 {落款|낙관} {年月日|연월일}의 독특한 서체 양식은 {漢字|한자}를 {元代|원대}의 공식 문자인 팍빠문자를 본따 각지게 새긴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府學公據|부학공거}는 {京兆府學|경조부학}의 토지와 부속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安西王|안서왕}(쿠빌라이 칸과 차브이 황후 간의 삼남인 망갈라) {相府|상부}에서 {京兆府|경조부}({元代|원대}에 {西安|시안} 일대를 가리키던 이름){府學|부학}으로 보낸 공식 문서이다. 해당 문서는 위와 같이 비석으로 새겨져 현대에 전해지는데, {元代|원대}의 {公據|공거} 문서가 희귀하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비림 관람을 마치며
제6실을 빠져나와 {石刻藝術館|석각예술관}을 둘러보았는데, {佛敎|불교} 예술이 주를 이루었고 특히 {北魏代|북위대}의 작품이 많았다. 이로써 {碑林|비림}박물관을 둘러보는 데 세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하나하나 음미하며 관람한다면 종일 보아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비석 중에는 단순히 문장을 새긴 것도 있거니와 {明淸代|명·청대}로 가면 정교한 그림을 새기거나 전위적인 서예 작품을 새긴 비석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말로 중요한 {碑石|비석}은 보호 유리를 설치하여 관람객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예 전시하지 않는데, 대다수의 비석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조금씩 마모되거나 훼손되고 있었다. 어떠한 사실을 감추거나 검열하기 위해 글씨가 새겨진 부분을 집요하게 긁어낸 비석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검열은 관람객에 의한 것은 아닐 터이고, {史料|사료}를 {改竄|개찬}하고 훼손하는 행위는 {東西古今|동서고금}을 막론코 늘상 있어왔지만, 몇몇 비석은 귀중한 역사 자료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최소한의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였다.
이름으로만 들어보거나 탁본의 디지털 스캔 사본으로만 보아온 유명한 비석들을 실물로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탁본과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 실물로 보았을 때에만 드러나는 디테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반면 탁본을 통해서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요소들도 존재한다). 또한 {人類|인류}가 고안한 비용 대비 가장 견고하고 지속성 있는 기록매체인 {碑石|비석}을 통해, 정보의 정렬과 보존・계승이야말로 {人類|인류}의 발전과 문명의 고도화에 기여한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점심식사
열두 시가 넘어서 {碑林|비림}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다음 일정인 {大慈恩寺|대자은사} 근처로 달려오니 12시 40분이었다. 아침을 걸러 허기가 진 상태였기에 식당을 물색하던 중, {雁塔西路|옌타시루} 대로변에서 {絲路餐廳|실크로드 레스토랑}이라는 녹색 간판을 발견하자 고민할 것도 없이 들어갔다. {新疆|신장} 지역의 특색 요리인 {大盤鷄|다판지}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였다. 메뉴판에 적힌 「{新疆很遠|신장은 멀지만},{舌尖先到|혀끝으로 먼저 다다랐다}」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모던하고 고급진 인테리어로 장식된 점내에는 중앙아시아 음악이 틀어지고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이국적인 {美貌|미모}의 종업원은 자신을 위구르인이라고 소개하였고, 나는 한국인이라고 답하자 반가워해주었다. 명찰에 적힌 이름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얼핏 보기에 여덟 글자를 넘겼으므로 틀림없이 위구르식 이름일 것이다. 저번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石田幹之助|이시다 미키노스케}의 에세이는 「당대 장안・낙양의 이그조티시즘은 그 주류를 이란 문화, 자세히 말하자면 사산조의 문물 및 그 유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는 구절로 마무리되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위구르 문화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前菜|전채}로는 {涼皮|량피}, 주요리는 당연히 {大盤鷄|다판지}에 {寬麵|콴몐}을 넣어서 주문하였다. {大盤鷄|다판지}가 완성되기까지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입의 심심함을 달랬다. 세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18元이 청구되었다.
대안탑
식당으르 나와 잠시 걸으니 {三藏法師|삼장법사}의 {威德|위덕} 드높은 {佛閣|불각}이 나타났다. 사원 입장료는 30元.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입장 후에 추가로 20元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탑에 오르기 전에 가방을 물품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652년에 {玄奘|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불상 등을 보관하기 위해 {大慈恩寺|대자은사} 부지에 지은 {西域|서역} 양식의 불탑이다. 원래 5층이었다가 {唐武則天|당 무측천} 때에 9층까지 증설하였고, 현재는 7층이다. 유명한 {岑參|잠삼}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초에는 {慈恩寺浮屠|자은사 부도} 혹은 {慈恩寺塔|자은사탑}과 같이 불렸다가 {雁塔|안탑}으로 개칭되었고, 마찬가지로 {長安|장안}에 위치해온 {薦福寺|천복사}의 {小雁塔|소안탑}과 구별하기 위해 지금의 {大雁塔|대안탑}이 되었다(혹은 {大乘|대승}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음). 이는 {埋雁建塔|매안건탑}의 {典故|전고}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北宋|북송} {熙寧|희녕} 연간에 불탔고, 1556년에 악명높은 {嘉靖大地震|가정 대지진}의 여파로 상층부가 붕괴하여 현재와 같은 7층탑으로 개수되었다. 대안탑은 지반 침하 탓에 {淸代|청대}에 이미서북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는데, 1997년에 지하수 대책 공사를 실시하여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唐代|당대} {進士|진사} 시험 합격자가 여기에 {記名|기명}했다는 풍습으로부터 「{雁塔題名|안탑제명}」이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나중에 {宰相|재상}이 되면 이름을 주색으로 덧칠했다고 한다. 탑 입구에는 안탑제명 {石刻|석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낙서 금지」라고 적혀 있는 건물 외장의 벽돌에는 안탑제명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조잡하게 긁어낸 낙서 흔적이 생겨나고 있다.
인파에 밀려가듯 가파른 계단을 올라 7층까지 올라갔으나 사실 볼거리는 크게 없었다. 다만 각 층마다 한두 개씩 전시 중인 진귀한 유물을 구경하고, 옛 시인들이 {風流|풍류}를 읊었던 바로 그 장소에 올라 {長安|장안}의 거리를 {高樓|고루}에서 내려다보는 체험에 의미가 있었다. 전시품 중에서는 {玄奘|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貝葉經|패엽경}과, 당연하게도 {唐代|당대}의 것은 아니나 란자나 문자가 주조된 풍탁이 비교적 흥미로웠다. 풍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행 중 한 명이 종서 부분을 oṃ āḥ hūṃ, 횡서 부분을 ༄༅།oṃ ma ni padme hūṃ།으로 판독하였다.
계단 폭은 협소한데 평일에도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올라가는 행렬과 내려가는 행렬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이동해야 했다. 최상층에서도 바깥 풍경을 보기 위한 자리 경쟁이 치열했다. 안전을 위해 창문은 조금밖에 개방되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바깥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아래 사진은 좁은 틈새로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 촬영한 결과이다.
{唐|당} {天寶|천보} 연간인 752년에 {高適|고적}・{薛據|설거}・{岑參|잠삼}・{儲光羲|저광희}・{杜甫|두보} 다섯 시인은 이 자은사탑을 올라 각자 같은 제목으로 {邊塞詩|변새시}를 지었다. 저번 글에서는 이중 가장 {秀逸|수일}하다고 평가되는 {岑參|잠삼}의 시를 번역 없이 일부만 수록했다. {薛據|설거}의 작품은 {散佚|산일}되어 현재는 네 작품만이 전한다. {岑參|잠삼} 시의 첫 {八句|구절}까지만을 {拙速|졸속}히 번역하였다.
잠삼「고적·설거와 함께 자은사 부도에 오르다」
탑의 형세는 솟구친 듯하여
고고하게 {天宮|천궁}에 치솟는도다
오르면 속세의 끝이 내려다보이고
계단길은 허공을 비틀려 도는구나
우뚝함은 {神州|신주}를 누를 듯하고
가파름은 귀신의 솜씨 같으며
네 모퉁이는 {白日|백일}을 가로막고
일곱 층계는 창공을 찌를 기세로다
기회가 된다면 네 작품 모두 직접 번역을 시도해보고 싶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탑을 내려와 사원의 나머지 건물을 구경하였다. 여러 차례의 {改築|개축}을 거치다보니 중심 건물은 {明淸代|명·청대} 양식이었다. 애초에 {西安|시안} 일대는 {唐|당} 멸망 이후 황폐화되었다가 {明代|명대}에 들어서 차츰 재건된 도시이기 때문에, 현대에 새로 복원하여 조성한 고적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明淸代|명·청대}의 건축 양식이 나타난다.
「{玄奘三藏院|현장삼장원}」이라는 대충 보아도 현대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군은 {唐代|당대} 양식으로 지어져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서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我國|아국}은 {千年古都|천년고도} {慶州|경주}의 {新羅|신라} 건축을 복원할 때 {中世|중세} 양식을 방불케 하는 {上綠下丹|상록하단} 단청을 고집하는 {惡習|악습}이 있는데, 고증의 정확성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唐代|당대} 사원에는 {唐代|당대}의 양식으로」 건물군을 조성하는 {中共|중공}의 시도는 높게 살 만하다. 특히 다음으로 방문한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의 {唐代|당대} 건축은 아주 본격적이라, {盛唐|성당}의 창성기를 그리는 관광객들에게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제공한다. {慶州|경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후술하겠다.
{商|상}의 후예로서 {理財|이재}에 비상한 중화 민족답게 {財神殿|재신전} 앞의 줄이 다른 어느 곳보다 길었다. {我國|아국} 이상으로 {祈福信仰|기복신앙}이 강한 중국은 새해 인사부터가 돈을 많이 벌 것을 기원하는 「{恭喜發財|궁시파차이}」이다. 돈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경제 개혁개방 이전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해진다.
{大慈恩寺|대자은사}를 남쪽으로 빠져나오면 폭이 넓은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玄奘|현장} 동상이 높게 솟아 있었고, 더 남쪽으로 나아가니 {玄奘|현장}・{鑒眞|감진}・{慧能|혜능}・{空海|공해} 사인방의 동상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외국인인 {空海|구카이}가 저 자리에 낀 것은 일견 의아하지만 그가 장안에서 유학한 결과로서 일본 불교사에 미친 거대한 영향을 감안하면 납득이 되지 않을까. {鑒眞|감진} 역시 불교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高僧|고승}이다.
대당부용원
광장이 있던 {雁塔東路|옌타둥루}에서 차례로 {慈恩東路|츠언둥루}와 {芙蓉西路|푸룽시루}로 걸어가니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唐文化|당 문화} 테마파크인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의 {御苑門|어원문}이 나타났다. {大唐芙蓉園|대당부용원}은 {唐代|당대} 양식을 재현한 중국 최초의 정원형 테마파크로, {唐代|당대}에 황제와 시민이 모두 어우러져 즐겼다고 하는 {芙蓉園|부용원} 유적 북측에 조성되어 2005년에 {開園|개원}하였다. {御苑門|어원문}에서 마침 무언가가 연출되고 있어 구경하기로 하였으나,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입장권은 인당 120元으로, 아마도 {西安|시안} 소재의 관광지 중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넓은 부지에 {唐代|당대} 양식으로 건축물을 {造成|조성}하고 다양한 {演出|연출}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값이 아닐까. 특히 내가 방문한 시기에는 {新春|신춘}을 맞은 기념으로 중국인이 무척이나 기호하는 {燈會|등회}를 위한 시설이 대량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표를 구입한 뒤, 잠시 전까지 공연하던 인원에게 점거되어 접근할 수 없었던 {御苑門|어원문}을 통과하여 {芙蓉園|부용원}에 들어섰다. {芙蓉橋|부용교}를 건너 {銀橋飛瀑|은교비폭}을 감상하고 그 자리에서 북진하여 {荷池觀魚|하지관어}에 다다랐다. {荷池觀魚|하지관어}에서 {芙蓉湖|부용호} 위에 놓인 {水上棧道|수상 잔도} 위를 걸으며 호수의 물고기와 물 너머 {龍舫|용방}의 누각을 바라보았다. 물고기에게 줄 먹이를 무인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는 굳이 하지 않았다. {龍舫|용방}은 실제로 물 위에 띄울 수 있는 배는 아니지만, 작년에 {奈良|나라} {平城宮|헤이조쿄}{跡|터}{歷史公園|역사공원}을 방문했을 때 관람한 {遣唐使船|견당사선}에 비해 꽤 호화스러운 것이 아닌가. {遣唐使船|견당사선}은 비록 {古代|고대} 일본의 선박이지만 {宋代|송대} 양식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는 「{吉備|기비}{大臣|대신}{入唐|입당}{繪詞|회사}」를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므로, {龍舫|용방}과 같은 거대한 {樓船|누선}이 {唐代|당대}에 실존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이 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갓 테마파크에서 세세한 {考證|고증}을 따져서는 {吝嗇|인색}하게 보이게 됨을 면할 수 없다.
정교하게 가공된 {棧道|잔도}를 되돌아와 호수의 둘레길을 걷는데, {唐代|당대} 복식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唐三彩|당삼채}의 유약 {磁器|자기}에서 본 바 있는 특징적인 복식이다. 이들은 {我國|아국}과 {日本|일본}의 복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곧이어 {芙蓉園|부용원}의 최심부에 위치한 가장 거대한 건물인 {紫雲樓|자운루}는 높은 {基壇|기단} 위에 4층 누각을 갖추고 양옆으로 무지개꼴 다리를 둘러 {四方|사방}의 {翼樓|익루}를 거느린다. 어째서인지 일행 중 한 명이 「별 것 없어 보인다」고 하여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데, 내부에는 70분짜리 「{夢回大唐|몽회대당}」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거대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공연의 제4막은 {胡騰舞|호등무}와 {胡璇舞|호선무}를 선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후회감은 더욱 커졌다. 이번 여행에서는 오랜만에 현지에서 중국어를 구사하느라 그쪽으로 집중력이 소모되어 적지 않은 오판을 내렸는데, 그중 가장 큰 실책이 바로 {紫雲樓|자운루} 패싱일 것이다. 대신에 {曲江胡店|곡강호점} 근처의 찻집에서 현대 중국어의 {齒音|치음}계열 {聲母|성모}의 발음을 {敎授|교수}하고, 현대어에서 {日母|일모}의 음소론적 해석을 두고 토론하였다. 그동안 바깥의 {曲江胡店|곡강호점} 무대에서는 소그드인 상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曲江胡店|곡강호점}의 주인공으로 하고많은 서역의 상인 집단 중에서 소그드인이 나오는 이유는, {隋唐|수·당대}에 들어 「{胡|호}」는 이란계 민족 중에서도 소그드인을 가리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돌궐 비문에서 altï čub soγdaq 「{六州|육주}의 소그드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漢籍|한적}에서는 {六州胡|육주호}로 칭해진다.
다과회를 마치고 복사꽃이 만개한(실제로는 {造花|조화}임) 정원에 다다르니 {園內|원내}에 자리잡은 호화 호텔인 {芳林苑|방림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층인 탓인지 우진각지붕인 점을 제외하면 특히나 {奈良|나라} {平城京|헤이조쿄}의 복원된 건물군을 연상시키는 양식인데 물론 중국 쪽이 원조이다. {唐代|당대} 레플리카 건축을 포함하는 테마파크의 일부 구획이 일본의 {造園|조원}설계 기업에 의해 조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통건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이곳 {芙蓉園|부용원}의 건축 양식과 복원된 {平城京|헤이조쿄} 일부 건물의 양식이 {唐代|당대} 건축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인식과 부합하는 데 반해, {慶州|경주} 소재의 {新羅|신라} 복원 문화재 건물들은 거의 {同時代|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매우 동떨어진 양식을 취하고 있기에 오래 전부터 의문으로 여겨 왔다. 특히 녹색 안료가 풍부하게 사용된 상록하단 단청, 반달 꼴의 암막새(즉 {雨滴瓦|우적와})와 서까래에 칠해진 형형색색의 꽃무늬, 위에서 찍어 누른듯이 곡선을 이루는 용마루는 매우 중・근세적이며 신라 왕경이었던 경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전통 건축에 조예가 없는 내 개인의 인상에 불과하나,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新羅|신라} 왕경의 복원 양식을 살펴볼수록, {中日|중·일}과 {我國|아국}의 고대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에 {彩廊觀瀾|채랑관란}에 다다라 호숫가를 따라 길게 놓인 {回廊|회랑} 밑을 거닐며 노을이 비치는 잔잔한 물결을 감상했다.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해질녘이 되자 관람객은 차츰 늘어나 거대한 부지를 차츰 채워가고 있었다. {回廊|회랑} 끝에 이어진 {八角亭|팔각정}에 오르니 {霧霾|미세먼지}에 산란된 해질녘의 태양빛은 하늘을 분홍빛으로 가득 채웠다. 주위가 제법 어둑해지자 슬슬 {燃燈會|연등회}를 위해 설치된 온갖 꽃무늬 초롱과 거대한 {女人|여인} 등불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종일 지친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인적 없는 {竹裏館|죽리관}에 들어갔다. 대나무숲 속에 만들어진 작은 휴식 공간인 {竹里館|죽리관}의 이름은 {盛唐|성당} 시기의 시인 {王維|왕유}의 유명한 시 「{竹里館|죽리관}」에서 유래한다.
{王|왕}{維|유}「{竹|죽}{里|리}{館|관}」
{獨坐幽篁裏|홀로 그윽한 대숲 속에 앉아}
{彈琴復長嘯|거문고 켜고 다시 휘파람 불고}
{深林人不知|남들 모르는 깊은 숲을}
{明月來相照|명월만이 찾아와 비추는구나}
「{篁|황}」은 여태 {笙篁|생황}이라는 악기의 이름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글자로, 그 본뜻은 「대숲」이라고 하여 비로소 {笙篁|생황}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었다. 어린 대나무 여러 줄기를 엮어 만든 목관악기인 {笙篁|생황}은 신비로운 화음을 자아내는데, 그 형태는 대나무숲의 축소판이라 칭해질 만하다. 여담이지만 관광안내판에는 {竹里館|죽리관}이 일본어로 「竹さと館」으로 기묘하게 표기되어 있고, 바닥 타일에는 「{里|리}」와 {通假|통가} 관계에 있는 「{裏|리}」를 써서 「{竹裏館|죽리관}」이라 적혀 있었다. 시의 내용을 고려하면 {竹里館|죽리관}은 「대숲 속의 집」일 터이므로, 「{里|리}」를 「마을」의 뜻으로 옮긴 「竹さと館」은 명백한 오역이다.
한적한 대숲 속에서 숨을 돌리다가 {不夜城|불야성}의 {光景|광경}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에 {芙蓉園|부용원}을 떠났다.
저녁식사
DiDi {打車|다 처}로 택시를 잡아서 호텔 근처로 돌아왔다. 택시 기사에게 음식점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내가 묵는 호텔 앞 거리를 걷다 보면 나오는 미식 거리의 음식은 전부 맛있다고 하였다. 다만 {回民街|회민가} 근처는 비싼데 맛도 없는 바가지 상권이니 그 근방의 식당만큼은 가지 말라고 충고를 받았다.
기사가 가리킨 거리에 오자, {小廚湘菜|샤오추샹차이}라는 식당이 유독 큰 녹색 간판을 걸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간판에 {陝川湘融合菜|산시·쓰촨·후난 퓨전요리}라고 적혀 있길래 궁금증이 나서 식당이 있는 지하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陝|섬}은 산시성, {川|천}은 쓰촨성, {湘|상}은 후난성을 의미하며, 중국에 방문하기 전에 이러한 지방 별 약칭을 숙지해두면 여행이 한결 편리해진다. {湘|상}은 일본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地名字|지명자}로서, 일본의 {相模灣|사가미만} 연안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湘南|쇼난}이라는 지명은 본래 {相模國|사가미국}의 남부라는 의미로 {相南|쇼난}이라고 하였다가, 훗날 지금의 중국 후난성 일대를 다녀온 일본의 한 {禪僧|선승}이 한자를 {湘南|쇼난}으로 바꾸었다는 의심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는 개구리 요리를 주문하기로 하였으나 재료가 소진되었다고 하여 대신에 {毛血旺|마오쉐왕}을 주문했고, 전채로 {醋溜土豆絲|추류투더우쓰}, 음료는 {小郞酒|샤오랑주}를 주문했다.
{土豆絲|투더우쓰}의 식감은 훌륭했다. {白酒|백주}를 처음 마시는 입장으로서 {小郞酒|샤오랑주}의 향미는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전날부터 부르튼 입술에 알코올이 닿자 작열감이 드는 바람에 편안하게 마시기 어려웠다. {毛血旺|마오쉐왕}은 중국어 관용 표현을 빌리자면 {美味下飯|메이웨이샤판}, 즉 쌀밥이 잘 넘어가는 좋은 맛이었다.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남겨야 했는데, 139元이 청구되었다.
식사 후 호텔에 돌아와 각자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2일차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출전
村松弘一(2020)「中国西安の史蹟保護調査報告―古写真の活用」『淑徳大学人文学部研究論集』第5号:129–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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