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황금 연휴}가 끝나기 전에 어디라도 다녀오자는 생각에 급하게 1박 2일 여행을 기획하였다. 이름하야 {東海道|도카이도}{本線|본선} {途中下車|도중 하차}의 여행. 일본 전국에 깔린 JR 노선은 출발역에서 도착역까지의 영업 거리 및 하차 구역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몇 번이고 도중 하차가 가능하다. 내가 이동한 경로는 다음과 같다.
1일차:도쿄 야마노테선 내 → 도쿄 → 아타미 → 요시와라 → 오키쓰 → 시미즈
2일차:시미즈 → 시즈오카 → 유이 {→|도보} 간바라 → 아타미 → 시나가와 → 도쿄 야마노테선 내
{東京|도쿄}에서 {靜岡|시즈오카}까지의 영업 거리는 편도 180km 정도이므로, 승차권은 총 이틀 간 이용할 수 있다. 당초 내가 구입한 승차권은 {東京|도쿄}{山手線|야마노테선}{內|내} → {安倍川|아베카와} 구간이었는데, 이튿날에 예보보다 일찍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강풍주의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靜岡|시즈오카}를 방문한 뒤 길을 되돌아오게 되었다.
도쿄:도카이도의 기점을 떠나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某|모} {山手線|야마노테선} 역의 {發券機|발권기}를 통해 승차권을 구입했다. 작고 얇은 종이 조각이지만, {江戶|에도}{幕府|막부} 시절 {東海道|도카이도}를 오가던 나그네의 {往來手形|통행 허가증}처럼 든든한 존재이다. 이것 하나만 지니고 있거든 {東海道|도카이도}{本線|본선}에서 도중에 들르지 못할 역이 없다.
{幕府|막부} 시대, {江戶|에도}를 떠나 {京都|교토}를 향하는 나그네들의 여행이 시작되는 {驛站|역참} 마을인 {日本橋|니혼바시}는 {東京驛|도쿄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철도 개통 이후에도 {東京驛|도쿄역} 일대는 {家康|이에야스} 이래 정비된 {東海道|도카이도}의 기점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東京驛|도쿄역}에서 {普通列車|보통 열차}의 롱 시트에 착석하였으나, 변덕을 부려 {品川|시나가와}부터는 그린{席|석}으로 이동하였다. {品川|시나가와}로부터를 기준으로, JR동일본과 JR동해의 관할 구간을 가르는 {熱海|아타미}까지의 영업 거리는 50km 초과 100km 이하이므로, Suica로 지불할 시 그린{券|권}의 값은 1,000円이다. 쾌적한 이동을 뒷받침하는 우등석으로서는 합리적인 삯이다.
열차는 {相模川|사가미가와}강과 {酒匂川|사카와가와}강의 철교 위를 상쾌하게 건너고, {小田原|오다와라}를 지나니 {相模灣|사가미만} 연안을 따라 {大洋|대양}을 마주한 산비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선 {人造物|인조물}을 내려다보며 터널을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다가, 이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유서깊은 온천 휴양지 {熱海|아타미}에 정차하였다.
아타미:이에야스의 탕에 발을 담구다
{熱海|아타미}에서 하차, 개찰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황금연휴를 맞아 몰려든 {人波|인파}와 북적이는 {驛前|역전} 거리이다. 올해는 마침 {熱海驛|아타미역} 개업 백 주년를 맞아 {驛舍|역사} 내에는 여러 기념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온천 휴양지를 즐기려면 {湯|탕}에 담겨야 할 텐데, 도중 하차를 하여 잠깐 경유할 뿐인 나는 이곳에 숙소를 잡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방문한 나도 선뜻 들어갈 수 있는 {湯|탕}이 역에서 도보 30초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아침 9시부터 16시 사이에 이용 가능한 「{家康の|이에야스의}{湯|탕}」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타미의 온천 물을 즐길 수 있는 족욕탕이다. 탕 앞의 자판기에서 발을 닦기 위한 타월을 100円에 판매하고 있으나, 내가 방문한 때는 자판기가 고장난 탓에 판매원을 통해 구입하였다.
탕의 온도는 40˚C 전후. 신발을 벗고 탕에 발을 담구니 적당히 좋은 자극이 전해져왔다. 발의 피로는 전신의 피로라고 했던가. 반대로 발이 편안하면 온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熱海|아타미}의 온천수는 냄새가 은은한 것으로 평이 좋고, 무엇보다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러 몸을 담궜다는 상징성 덕에 온천 마을로서의 위상을 꾸준히 유지하며 번성해왔다. 전성기에는 여관만 4백 곳이 넘어, 1975년에 홀로 여행을 온 {趙甲濟|조갑제}가 길을 잃었다는 {熱海|아타미}이지만, 지금은 예전만큼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적인 명성을 품은 휴양지임은 분명하다. {家康|이에야스}가 담긴 탕에서 {家康|이에야스}가 닦은 길을 바라보는 특별한 체험. {熱海|아타미}에서 발의 피로를 씻어내니 {東海道|도카이도} 여행의 첫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요시와라:다고노우라를 내려다보다
{熱海|아타미}에서 10시 51분{發|발} {濱松|하마마쓰}{行|행} 보통열차를 탑승, 11시 반경에 {吉原|요시와라}에서 하차했다. 이 역에서 하차한 승객은 내가 유일했다. 초라한 {簡易驛|간이역}이지만, 나름 {岳南電車線|가쿠난덴샤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환승역이다. 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富士山|후지산}과 {田子ノ浦|다고노우라}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공원이 있어 그곳을 향했다.
{田兒之浦|다고노우라}는 {古代|고대}에는 {薩埵峠|삿타토게}고개를 북쪽으로 넘어서면 나오는 해안을 일컫는 지명으로 『{萬葉集|만엽집}』에도 나오지만, 현대적 맥락에서 {田子ノ浦|다고노우라}는 내가 방문한 {吉原驛|요시와라역}에서 남서쪽으로 나아가면 나오는 항구를 가리킨다. {田子ノ浦|다고노우라}는 {浦口|포구} 너머 {富士山|후지산}이 비교적 가깝게 바라보이는 풍경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석유 저장고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港灣|항만} 시설이 들어서면서 그 경치가 빼어나게 좋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15분 정도 걸으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 내에는 작은 {阿字神社|아지신사}와 화려하게 우뚝 솟은 {佛舍利塔|불사리탑}, 그리고 {富士山|후지산}과 {田子ノ浦|다고노우라} 항구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탑이 있다. 하늘이 이리도 쾌청한데 어째서인지 {富士|후지}의 {山頂|산정}은 구름 속에 숨어 좀처럼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현재 위치가 맑게 개어 있어도 {富士山|후지산}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고, 또 {山勢|산세}의 형편 상 습기를 머금은 {氣流|기류}가 기슭을 타고 상승하기 쉬우므로, {宿雪|숙설}이 구름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상황은 곧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괜찮다. {駿河國|스루가국}에 들어온 이상 {富士山|후지산}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번 여행의 주요 목표인 {三保松原|미호노마쓰바라}에는 이보다 아름다운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키쓰:성신교린의 무대를 둘러보다
{吉原|요시와라}의 간이역으로 돌아와 {濱松|하마마쓰}{行|행} 열차에 탑승했다. 열차는 {源平合戰|겐페이 합전}에서 {平家|헤이케} 진영이 물새의 날갯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撤退|철퇴}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富士川|후지카와}강을 건너, {二峠六宿|2고개 6숙}이라고 불리는 {東海道|도카이도} 최악의 {難所|난소} 중 한 곳인 {薩埵峠|삿타토게}고개를 오른편에 보면서 옥돔이 맛있는 {興津|오키쓰}에 도착했다. {駿河灣|스루가만} 일대는 {黑潮|구로시오}{海流|해류}가 쓸어온 영양분과 플랑크톤이 유입되기 쉬운 지형 덕분에, 수자원이 풍부하고 해산물의 품질도 높은 것으로 평판이 좋다. 벚꽃새우와 {稚魚|치어}도 명물이다.
역 주변의 거리는 인근역에 비하면 편의 시설의 구색을 갖춘 편으로, 아무래도 {江戶|에도}를 향하는 나그네가 악명높은 {薩埵峠|삿타토게}고개를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는 역참 마을로서의 중대한 역할은 오늘날에도 그 {情趣|정취}를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반대로 {京都|교토}를 향하는 나그네에게는 험준한 산을 넘어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는 휴식의 장소이기도 했다.
일본 {國道|국도} 1번, 즉 예로부터 이어지는 {東海道|도카이도}를 남서향으로 걸으며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와의 인연이 깊은 {淸見寺|세이켄지}를 향했다. {興津鯛|오키쓰다이}라고 하는 명물 옥돔 요리를 점심으로 먹으려고 했으나, 철도 개업 이후 {東海道|도카이도}는 상당히 쇠퇴하여 음식점, 특히 {日食|일식} 정식을 제공하는 가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東海道|도카이도}의 열일곱 번째 역참인 {興津宿|오키쓰숙}을 지나 도중에 발견한 마트에 방문하여 끼니를 때웠다.
녹색 소나무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따라 걸어가니 드디어 {淸見寺|세이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総門|총문}과 나머지 {境內|경내} 사이에는 {東海道|도카이도}{本線|본선}의 철로가 놓여 있어, 웅장한 사찰과 그 정문 사이로 몇 분마다 기차가 지나가는 진풍경을 자아낸다. {総門|총문}에 내걸린 「{東海名區|동해명구}」 편액은 무려 제8회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倭學上通事|왜학 상통사}였던 {錦谷居士|금곡거사} {玄德潤|현덕윤}의 자필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東海道|도카이도}는 {通信使|통신사}와의 {緣|연}도 깊은 길인데, {釜山|부산}을 떠나 {下關|시모노세키}에 상륙한 다음, {京都|교토}에서 {天皇|천황}을 알현한 뒤에는, {名古屋|나고야}를 거쳐 권력의 실세인 {關白|관백}이 머무는 {江戶|에도}를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淸見寺|세이켄지}가 수장하는 사료의 일부가 2017년에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올해 상반기에 {倭城|왜성} 탐방 겸 {釜山|부산}의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방문하고, 또다른 여행의 일환으로 {相島|아이노시마}와 {下關|시모노세키}의 조선통신사 상륙지를 방문한 입장으로서는 감회가 새롭다(훗날 글로 정리하여 올릴 계획이다).
330円의 {拜觀料|배관료}를 지불하고 {館內|관내}를 구경하였다. 정원의 경치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통신사 수행단과 일본인 간의 {詩文唱和|시문창화}의 흔적이 편액으로 만들어져 내걸린 풍경이었다. 두 차례의 {倭亂|왜란}으로 외교 관계가 완전히 파탄난 {朝日|조일} 양국이 다시금 친선을 도모하고자 재개된 통신사. 그 기념비적인 1607년 첫 수행에 참가한 {正使|정사} {呂祐吉|여우길}, {副使|부사} {慶暹|경섬}, {從事官|종사관} {丁好寬|정호관}에 의한 {七言絶句|칠언절구} 시문 현판이 {誠信交隣|성신교린}의 현장을 과시하듯 내걸려 있었다.
제6회 통신사를 수행한 {從事官|종사관} {南龍翼|남용익}의 {五言|오언}・{七言律詩|칠언율시} {詩稿|시고} 현판, 그 아래에는 {興津|오키쓰}를 사랑하여 이곳에 별장을 지은 {日本帝國|일본제국}의 시대의 정치인 {西園寺|사이온지}{公望|긴모치}의 「長吟對白雲」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곡선이 우아한 {鐘樓|종루}에는 제5회 통신사를 수행한 {讀祝官|독축관} {朴安期|박안기}에 의한 「{瓊瑤世界|경요세계}」 편액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淸見寺|세이켄지}를 상징하는 {鐘樓|종루}에도, {淸見寺|세이켄지}의 경내에 진입하기 위한 {総門|총문}에도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 관리의 친필 편액이 내걸려 있음은 뜻깊은 일이다.
{淸見寺|세이켄지}가 소장하는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수록한 『{朝鮮|조선}{通信使と|통신사와}{清見寺|세이켄지}』 도록을 1,000円에 구입하였다. 사찰을 지나다니는 기차를 한동안 내려보다가, {東海道|도카이도}를 {上行|상행}하여 다시 {興津驛|오키쓰역}으로 돌아왔다.
시미즈:솔밭에서 후지산을 바라보다
{興津|오키쓰}의 바로 다음 역인 {淸水|시미즈}에서 하차했다. 관광 명소로서 {驛舍|역사} 및 인파의 규모는 {熱海|아타미}에 비견될 만한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지산 – 신앙의 대상과 예술의 원천」으로 등재된 {三保松原|미호노마쓰바라}가 위치한 일본 굴지의 명승지인 때문이다.
{三保松原|미호노마쓰바라}까지 바래다주는 시내버스를 타고 도로 위를 이동하는데, 역시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지인만큼 인바운드 관광객이 많아 외국어가 버스의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베트남어, 중국어, 한국어가 난무하는 들뜬 여행객의 담소를 들으며 곧 목적지에 다다랐다. 종착역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이 탑승하는 일본 버스에서 으레 발생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IC 카드 없이 현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외국인에게 있어, 일본 버스의 {整理券|정리권} 개념과 생소한 현금 지불 방식은 하차 시의 혼란을 유발하는 요소이다. 때문에 관광지에서 하차 과정이 크게 지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버스에서 겪은 황당한 일
관광지에서 버스 이용법을 몰라 헤매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관광객 일행에 의해 약간의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화를 풀기 전에 우선 일본 버스의 현금 결제 방식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대부분의 일본 버스는 운임을 현금으로 결제할 경우, 탑승 시에 {整理券|정리권}을 받아두어야 한다. 버스에 달린 디스플레이에는 {整理券|정리권}의 숫자와 함께 운임이 표시되어, 하차할 때 자신이 얼마만큼 지불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번에 탑승한 버스는 후문에서 탑승하여 전문으로 하차하는 구조인데, 버스 기사의 좌석 옆에는 동전을 투입할 수 있는 기계가 마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바로 이 기계 때문에 헤매게 된다.
기계는 IC 카드를 태그할 수 있는 리더기가 있지만 대다수의 외국인 관광객은 IC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현금의 경우 (1) 정리권 및 운임 투입구, (2) 지폐 및 동전 환전구가 존재한다. (1) 투입구에는 지폐나 동전을 한 번 넣으면 잉여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정확한 운임을 넣어야 한다. 따라서 지폐나 동전을 더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교환하기 위해서 (2) 환전구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베트남 단체 관광객이 이용법을 헤매느라 줄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종 여유로움과 웃음을 유지하며 별다른 문제 없이 하차에 성공하였다. 반면 내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인 일행은 약간의 트러블을 유발하고 말았다. 20대 여성으로 보이는 한국인은 부모 두 분을 모시고 여행을 온 효녀로서, 다만 세 명 모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앞서 부모 두 분은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年輪|연륜}을 구사하여 어찌저찌 이 복잡한 지불 기계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성공, 무사히 하차하였다. 그러나 딸의 경우, 정리권을 (1) 투입구에 넣었고, 뒤이어 5백 엔 동전을 (1) 투입구에 그대로 넣으려고 하자 기사가 막아세웠다. 나는 친절을 베풀고자 우선 (2) 환전구에 동전을 넣을 것을 손짓과 말로 알려주었고, 5백 엔은 더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교환되었다. 그러나 (2) 환전구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교환된 동전을 챙긴 뒤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여 기사가 다급하게 말려세우고 말았고, 이에 패닉이 발생, 나는 교환된 동전을 (1) 투입구에 넣도록 손짓으로 알려주었으나, 이번에는 교환된 동전을 무심코 전부 넣으려고 하는 바람에 기사가 또다시 막아세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미 상당한 금액이 투입된 상태였고, 남은 돈 2십 엔만 지불하면 되었다. 그러나 십 엔 동전이 부족한 그녀에게 다시 (2) 환전구를 이용하도록 안내하는 기사의 안내는 도리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으나 그리할 겨를도 없이 해당 여성은 지불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언성을 높이며 부모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누구나 당황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고, 생소한 기계를 잘못 다루는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결제를 마친 이후에도 버스에서 내려 짜증과 윽박을 지르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아버지 되는 분이 나름대로 이해한 기계의 사용법을 설명해주었고, 그 설명은 단시간에 파악한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분석에 의한 것이었으나, 딸은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우기면서 최종적으로는 모든 게 아버지의 탓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옳은 말도 달게 힐난받아야 하는 가장의 서러움을 현장에서 목격한 나는 문뜩, 그녀가 기계 사용법을 설명해준 기사와 내게 어떠한 감사 인사도 남기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떠나간 것에 심히 무례함을 느꼈다. 실은 관광지에서 한국인에게 대중교통 이용법을 알려주고 감사 인사를 받지 못한 무례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를 방관하는 행위야말로 더욱 큰 무례일 터이니,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나는 기꺼이 친절을 베풀 것이다.
미호노마쓰바라
{我國|아국}에 {報恩|보은} {俗離|속리}의 {正二品松|정이품송}이 있다면, 일본에는 {羽衣の松|하고로모 소나무}가 있다. 수령 약 300세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는 현재 3대째로, 그 가지를 꺾어 1997년에 해변 방면에 심은 4대째가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언젠가 3대째가 시들어버리면 4대째로 교체하여 {羽衣の松|하고로모 소나무}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예비 조치이다. 온갖 수난을 겪은 {正二品松|정이품송}도 이처럼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빼곡하게 들어선 {三保松原|미호노마쓰바라}의 소나무는 바닷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이 피해를 입는 사태를 막기 위해 심어진 {防風林|방풍림}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벌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해변으로 나가자 솔밭 옆으로 짙은 잿빛의 {沙場|사장}이 펼쳐지는데, 화산 분화의 흔적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羽衣の松|하고로모 소나무}에 가까운 해변에 머무르며 바다와 후지산의 경치를 즐기지만, 나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을 때까지, 또 콘크리트 인조물과 테트라포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북녘으로 걸었다. 그렇게 내리 2km 넘게 북상하였고, 해가 기울기 시작한 초저녁 무렵 은은하게 보이는 {富士山|후지산}을 만족스러운 구도로 사진에 담아냈다. 이것으로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시즈오카:프라모델의 성지를 순례하다
{淸水|시미즈}의 호텔에서 1박하였다. 새벽부터 날이 궂어지더니 비가 내리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원래는 {薩埵峠|삿타토게}와 더불어 {二峠六宿|2고개 6숙}의 하나인 {宇津ノ谷|우쓰노야}고개의 {明治|메이지} 터널을 보러 갈 작정이었으나, {雨天|우천}에 방문하기에는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 대신에 오전 시간을 {靜岡|시즈오카}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올해로 개업 70주년을 맞은 {老鋪|노포} 「{富士見|후지미}{そば|소바}」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靜岡驛|시즈오카역} {上|상}・{下行|하행} 플랫폼에 각각 한 점포씩 운영 중인 이곳은 플랫폼 상에서 식사를 해결하던 예로부터의 풍경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370円의 가케우동을 주문하였다. 싸늘하게 비가 내리는 와중에 속을 데웠다.
프라모델의 성지로 알려진 {靜岡|시즈오카}는 근년 「프라모뉴먼트」라는 새로운 관광화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어,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찾아보자는 생각에 역 근방에 위치한 세 군데의 프라모뉴먼트를 들러보았다. 그 전에 시즈오카특산공업협회와 몇몇 협찬 기업의 지원으로 탄생한 「시즈오카 호비 스퀘어」라는 프라모델 전시관을 관람하였다. 오토바이, 전투기, 자동차, 건담, 헐벗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오르골, 건축 미니어처 등, 정교한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조된 미니어처 프라모델을 구경하였다.
역 근방의 프라모뉴먼트를 둘러보았다. 실제 {新幹線|신칸센} 좌석을 활용하여 만든 모뉴먼트와, 실제 이용이 가능한 NTT 공중전화가 놓인 모뉴먼트가 인상적이다. 이미 {富士山|후지산}을 품은 {靜岡|시즈오카}이지만, 새로운 관광 자원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나가는 모습은 일본 내수 관광의 경쟁으로 말미암은 관광지의 질적 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상보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바람에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가고자 {窓口|창구}를 찾았으나, 금일 운행하는 버스는 모두 {滿席|만석}이었다. 기왕 이리 되었으니, 계획대로 {歌川廣重|우타가와 히로시게}의 {名畫|명화}도 볼 겸 {靜岡驛|시즈오카역}에서 {上行|상행} 승차권을 발권하였다.
유이・간바라:히로시게의 명화를 감상하다
{靜岡|시즈오카}를 떠나 {由比|유이}에서 하차하였다. 황금 연휴 동안 버스는 {運休|운휴}인 관계로 역 앞에는 택시가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는 역 앞에서 버스를 타서 {由比|유이}{本陣|본진}{公園|공원}{前|앞}에서 하차하면 {歌川廣重|우타가와 히로시게}{美術館|미술관} 코앞까지 걷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연휴 기간의 지역 버스 운행 계획을 간과하고 있던 나는, 강풍주의보가 발령된 상황에서 부득이한 {雨中|우중}{強行軍|강행군}을 감행하였다.
{薩埵峠|삿타토게}를 등지고 북동 방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 우산을 써보아도 빗줄기는 바람에 휩쓸려 전신을 타격한다. 물이 불어나 급하게 흐르는 {由比川|유이카와}강에 다다랐을 때 {蒲原|간바라}까지 절반이나 왔음을 짐작하고, 머지않아 다가온 옛적 {由比|유이}{本陣|본진}에 달아나듯 들어가 비를 피했다. 과거 {本陣|본진}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과 교류관, 그리고 {東海道|도카이도} 53{次|차}를 배경으로 그린 {浮世繪|우키요에} 화가로 저명한 {歌川廣重|우타가와 히로시게}{美術館|미술관}이 있다. 그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작품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歌川|우타가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것은 {保永堂版|호에이도판} 『{東海道|도카이도}{五拾三次|53차}之內』로, {東海道|도카이도}에 놓인 쉰석 역참을 중심으로 경관을 묘사한 {名所畫|명소화}이다. {浮世繪|우키요에}의 역사와 유형, {歌川|우타가와}의 인생, 그 외의 유명한 화가, {版畫|판화} 제작 순서 및 도구, {版元印|한모토인} 및 {改印|아라타메인}, 염료, 53{次|차}의 역사 등 볼거리 배울거리가 풍부한 미술관이다. 관람을 마치고 직접 판화를 찍어보는 체험 활동을 참가해보았다. {版畫|판화}의 특성 상 종이 한 장에 몇 번이나 인쇄를 하게 되는데, 물감이 번지지 않고 깔끔하게 찍어내려면 상당한 숙련도가 요구됨을 깨달았다.
미술관 앞 교류관에는 {由比宿|유이숙} 거리를 재현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53{次|차}의 역참 마을은 거리의 구획과 가게 상호 등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이처럼 세밀하게 재현이 가능하다. 도로변에서 바라본 각각의 건물은 폭이 상당히 좁지만 {垈地|대지} 깊이는 상당히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충분한 면적이 확보된다.
관람을 마치자 다행히도 비는 잦아들었고, {由比驛|유이역}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거리만큼 다시 걸어 {蒲原驛|간바라역}에 다다랐다. {驛舍|역사}를 촬영하다가 열차를 놓친 철도 매니아 한 명과 인상적인 곡선 플랫폼을 바라보며 {上行|상행} 열차를 기다렸다.
아타미:특급 오도리코에서 명물 가마보코를 맛보다
나는 필연적으로 다시 {熱海|아타미}로 돌아왔다. 선로가 이어져 있다고는 하나 관할이 갈리는 탓에 환승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發券機|발권기}를 이리저리 조작하여 {特急券|특급권}을 구입했다. 연휴 마지막날인 관계로 매우 혼잡한 와중에 어떻게든 {特急|특급} {踊り子|오도리코}의 {窓|창}가{席|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 이어서 {驛辨|에키벤}집을 찾았으나 금일 판매분은 매진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JR동일본에서 운영하는 편의점 체인 NewDays에서 1814년에 창업한 {小田原|오다와라}{籠淸|가고세이}의 {名物|명물} 가마보코 「{磯三昧|이소잔마이}」를 구입하였다. 가마보코는 냄새를 거의 풍기지 않으니 혼잡한 차내에서도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먹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JR 동해의 {新幹線|신칸센} 플랫폼 앞에 수공예로 제작한 탑승 안내 포스터가 눈에 띈다. 직접 그린 탓에 괜히 더 알기 어려워진 듯하지만 정성은 대단한 것이다. 주요역을 제외한 역을 통과하며 쾌적하게 달리는 JR 동일본 E257계 안에서 저녁 식사로 가마보코를 먹었다. 열차는 금세 {品川驛|시나가와역}에 {入線|입선}하였다.
시나가와:여행의 마무리
이로써 급조된 {東海道|도카이도}{本線|본선} {途中下車|도중 하차}의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東海道|도카이도}의 역사와 의의,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 기록물과 {浮世繪|우키요에} 등, 이번 여행을 통해 기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를 보다 깊이 배울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 목표는 {箱根|하코네}에 들러 스위치백 운행을 하는 {箱根登山線|하코네 등산선}을 즐기고, 또 {東海道|도카이도} 여행이라는 취지를 살려 {濱松|하마마쓰} 너머 {名古屋|나고야}까지 가보는 것이다.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의 이동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보며 당시의 {紀行|기행}에 나오는 기록과 실상을 비교해보는 여행도 오래 전부터의 바람이었다. 이런 대담한 계획은 머지않아 다가올 {技術|기술}{革命|혁명} 이후에나 실현 가능할 터이지만, 하게 된다면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 {永嘉臺|영가대}에서 {海神祭|해신제}를 베푸는 등 본격적으로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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