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 가볼까 채비를 하는데 생각해보니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 서점이 많아서 고민하던 찰나, 나가타초를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가타초에는 일본 국회도서관이 있으며 조금 걸으면 ‘황거’도 멀지 않습니다. 즉, 독서한 뒤 산책하기 좋은 동네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독서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Chrome 모바일 앱의 Discover 페이지에 ‘오에도 골동시’ 웹사이트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이 날 유라쿠초역 앞 도쿄국제포럼에서 골동품 시장이 개최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전에 베이징 판자위안潘家園의 골동품 시장에 방문하여 소소한 잡동사니를 구입했던 즐거운 기억이 떠올라 더위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또한 마침 며칠 전부터 야후옥션 등의 통신 판매 사이트에서 골동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전戰前 군사엽서나 일제 치하의 조선 관련 물건을 찾아보고 있었기에 오에도 골동시는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오에도 골동시
지하철을 타고 유라쿠초역에서 하차하여 도쿄국제포럼 방면 출구로 나오자 ‘오에도 골동시’라고 적힌 자줏빛 현수막이 나타났습니다. 개찰에 가까운 가설 점포를 본 첫인상은 골동품 시장보다는 플리마켓이었습니다. 직접 만든 공예품이나 깨끗한 그릇, 장신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 점포에서 오래된 공책, 전단지, 엽서, 카드 등을 모아서 판매하고 있어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제가 주로 관심을 갖는 물건은 오래된 다기나 수상하게 녹이 슨 엽전이 아니라, 글씨가 적혀 있어 읽을거리와 스토리가 있는 종이 재질의 골동품입니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니 플리마켓스러운 분위기는 점차 옅어지고 ‘진귀’해보이는 엽전, 직물, 다기, 사무라이의 도검 등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아침 일찍 비가 내렸기 때문에 바닥이 젖어 있었고 나무에서 한 방울씩 고인 빗물이 떨어져 점포에 진열된 물건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기와 엽전류는 괜찮다 하더라도 종이로 된 물건은 한 번 젖으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기 때문에 천막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깔끔하게 비닐 포장된 엽전들이 진열된 점포를 지나가는데, 한 중년 남성이 “전부 다 유산을 뿌려서 만들어진 가짜군요”라며 주인장의 심기를 긁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푸른 녹이 슨 엽전들이 많았습니다. 푸른 녹이 슨 것만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면 섣부른 판단이겠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온라인 옥션에서 본 바 있는 위조품들은 모두 비슷한 식의 부자연스러운 푸른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번개장터와 야후옥션 등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위조된 엽전과 서책은 터무니 없이 조잡함에도 고가에 거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란소자가 새겨진 엽전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는데,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원형경의 구절에 나타나는 네 단어가 그대로 베껴 새겨져 있었으며 유산 따위를 뿌렸는지 푸른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허술한 위조품은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공공연히 유통되고 있으며, 그저 명품 브랜드의 사치품을 수집하는 듯한 감각으로 최소한의 사전지식 없이 골동품을 사모으는 무지한 사람들을 그들도 모르는 새에 골탕먹이고 있습니다. 골동품의 위조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두 시간 정도 둘러보았으나 어떤 물건도 구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골동품 시장은 전람회처럼 구경하는 데에도 재미가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물건을 사도 집에 둘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전 시간대에 주로 둘러보았는데 중국어가 자주 들렸습니다. 중국인 수집가들이 원정을 나올 정도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행사인듯 했습니다.
도쿄교통회관과 점심
도쿄국제포럼은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도쿄역에서 가깝습니다. 또 신칸센을 타고 도쿄역을 지나가봤다면 도쿄교통회관, 요미우리신문사, 아사히신문사 등의 건물이 보이고 그 근처에 시원하게 뚫린 넓은 거리를 목격하셨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순식간이지만 도쿄역에서 발차한 열차의 차창을 통해 반드시 보게 되므로, 듣기로는 철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경관이라고 합니다.
복합 상업시설인 도쿄교통회관의 1층에는 일본 각지에서 들어온 지역 특산품과 식품 및 가공품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홋카이도, 아키타현, 오키나와현의 특산품 가게를 방문하여 구경했습니다. 면의 굵기 면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만이 존재하는 미야코 소바, 야에야마 소바, 오키나와 소바가 진열된 것을 촬영했습니다.
바로 옆 긴자 INZ 건물 2층에는 다양한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으므로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마라센푸麻辣川府라고 하는 중국 쓰촨요리 음식점에 들어가 마라 도삭면과 샤오룽바오를 주문했습니다.
식사 후 우에노까지 내리 걸었습니다. 우에노역 근처에는 존황토간尊皇討奸 등의 현수막을 내건 일장기 부대의 시위가 시끄럽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배외주의적 성격이 강한 시위임에도 노골적인 혐한 문구는 발견할 수 없었고, 본디 ‘한일 국교 단절’이라는 문구가 들어갈 법한 자리에 ‘중일 국교 단절’이 대신 들어가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우익 섹터 내에서 혐한·반일 담론은 그 전성기에 비해 상당히 소강되었고, 보상적으로 반중·반일 담론이 강화되었다는 말은 사실인 듯합니다. 날이 더웠던 관계로 이 날의 일정은 이것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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