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의미한 비밀 댓글은 무통보 삭제


언어/한국어족

《만엽집》 1:9의 난독 구절은 고대 한국어

반응형

서기 8세기 고대 일본어로 작성된 고전 시가집 《만엽집萬葉集》은 스무 권 구성인만큼 수록된 노래의 양이 방대합니다. 고대 일본어의 연구는 에도시대 일본 국학자들이 《만엽집》을 고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슷한 성격의 문헌일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삼대목三代目》은 고대 한국어를 반영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미 오래 전에 산실되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일본어는 문헌 자료를 활용한 고대 언어의 연구에 참으로 축복받은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엽집》에는 단 한 수, 연구자들로부터 고대 한국어를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시가 존재합니다.

莫囂圓隣之大相七兄爪謁氣 (고대 한국어로 여겨지는 난독 구절)
吾瀨子之 “나의 님께서”
射立爲兼 “떠나가버렸구나”
五可新何本 “언제 다시 만나리”

 

분명하게 고대 일본어라고 말할 수 있는 후반부의 경우에도 학자에 따라 다르게 해독되기도 합니다만, 이 글의 주제와 관련성이 떨어지는 문제이므로 상술하지 않겠습니다.

권1 제9수 〈기이 온천에 나들이 가신 때 누카타노오키미가 지은 노래〉의 전반부 “莫囂圓隣之大相七兄爪謁氣”는 오랜 세월 일본의 국어학자들의 골머리를 썩인 난독 구절입니다. 이 시는 2024년 현재에도 아직 명쾌하게 해독되지 못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시의 난독 구절은 《만엽집》의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일본의 승려 센가쿠仙覺의 《만엽집 주석》(1260년대)에 읽는 법이 실려 있어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센가쿠 주석서에 나타나는 어색한 속격 표지 사용에 관한 해설은 향문천(2024:102–103)에 자세합니다.


“저녁 달의 우러르고 물었다”

 

그러나 센가쿠의 주석서에 나온 고대 일본어로 된 읽는 법을 원문 한자 표기를 통해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저명한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의 2002년 논문과 2017년 《만엽집》 해설서에서 역설되었듯이, 이 시의 전반부는 고대 일본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보빈(2017:52)은 몇 글자를 교정하고는 다음과 같이 난독 구절을 고대 한국어로 해독했습니다.

莫器圓隣之大相七兄爪湯氣
NACOkʌ-s tʌrari thi-ta-PO-n-[i]-isy-a=ca mut-ke
저녁-gen 달 prev-conv-보다-past.attr-[nml]-있다-conv=emph 묻다-conf
“저녁 달을 쳐다보고 물었다”

 

보빈의 시도는 권1 제9수의 난독 구절을 고대 한국어로 풀이한 최초의 학술적인 의미가 있는 해독입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을 요하는 중대한 문제점을 적어도 두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보빈의 해독안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제 견해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문맥 상 난독 구절의 ‹之›는 주석서의 속격 표지 에 대응해야 하므로, ×티다보- thi-ta-PO- 의 ‘티’에 해당하는 표음자로 보기 어렵습니다. 중세 한국어의 격음 ‘ㅋ’ ‘ㅌ’ ‘ㅊ’ ‘ㅍ’은 이차적 기원을 가지며 고대 한국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보빈이 제시한 해독이 고대 한국어의 형태를 중세 한국어의 형식에 투영한 결과물이라고는 해도, 이러한 격음의 상정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됩니다. 판본 별로 주필朱筆이 가해진 위치를 보면, 대부분이 ‹隣›의 우하단입니다만, 기이본紀伊本과 진구문고神宮文庫본처럼 ‹之›의 바로 우측에 찍혀 있는 판본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만엽집 교본 데이터베이스

 

둘째, 보빈은 한국어 ‘물’을 근거로 자신이 교정한 ‹湯›을 mut- “묻다”로 읽었으나 잘못입니다. 먼저 한국어사에서 ‘물’은 [ㄷ]과 같은 폐쇄음 자음을 가졌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만엽집》은 8세기 문헌이지만, 누카타노오키미는 7세기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서기 6세기 이전에 사용된 전기 고대 한국어에서 ‘물’에 해당하는 단어가 ‹買› *mɛr으로 나타나므로, 보빈의 mut-은 무리한 가정입니다. 애초에 보빈의 생각과 달리 원본에서는 ‹湯›이 아닌 ‹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훌륭한 역사비교언어학 개론서인 히라코 다쓰야 외 《일본어·류큐제어에 의한 역사비교언어학》(2024)에는 언어에 있어서 조어祖語의 재구와 문헌 판본에 있어서 조본祖本의 재구가 종종 비교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떠오른 것은, 후예 언어의 개신innovation을 판별할 때 자연성naturalness이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되듯이, 사본의 오사誤寫를 판별할 때에도 자연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자 필기체의 특성 상, ‹謁›이 ‹湯›으로 잘못 필사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聲›의 조선 후기 약자인 ‹洋›과 같이, 좌변을 흘려쓰면서 삼수변 ‹氵›으로 오인되어 행서화되는 현상은 흔하게 나타납니다.

何華珍·胡伊麗(2021:142)의 10번 항목.

 

《만엽집》에 수록된 시는 기본적으로 5·7조를 따르는 정형시입니다. 따라서 권1 제9수도 5·7조의 양식에 따라 분석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저는 센가쿠의 주석서에 나온 해석 “저녁 달의 우러르고 물었다”가 올바르다는 전제 하에, 이 난독 구절을 원문을 다음과 같이 교정하고 고대 한국어로 해독하고자 합니다.

莫器圓隣之 / 大相七兄孚謁氣
*natɕVk-ɛs tɔr-ɛr / ɔtV… sɛrpɔ-ɛtɔk-ɛs

 

첫 다섯 글자는 보빈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나 ‹之›를 센가쿠의 주석서에 나타나는 속격 표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현전하는 모든 판본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囂›는 상용자가 아니며 표음자로서 선택될 동기가 희박하므로, ‹器›의 오자로 판단하여 교정합니다. 상고음에서 운미 *-ts가 재구되는 器는 동한 시대에 -s로 변화한 뒤 중고음의 거성 -j 운미에 합류합니다. 고대 한국어 한자음의 특정 층위는 『시경』과 해성諧聲을 통해 재구되는 상고음과 《절운切韻》 체계에 기반하는 중고음 사이의 일정 단계에서 운미 *-s를 반영하는 한자음 체계를 수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莫器› *natɕVk-ɛs는 중세 한국어의 nacwoh(이하 방점은 생략) “저녁”에 대응하는 고대 한국어 형태에 모종의 접사가 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圓隣›은 “달”에 속격 표지가 붙은 것으로 해석하며 ‹之›는 잉여적인 표기소로 간주합니다. “달”에 관한 상세한 해설은 향문천(2024:98–105)에 있습니다.

‹大相七›은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문자열일 것입니다. 우선은 넘어가겠습니다. ‹兄›은 고구려 관명에서 ‹相› ‹奢›의 이표기로 나타나는 글자이므로 *sɛr로 읽습니다. 고대 한국어 한자음의 모 층위에서는 相과 같이 중국어에서 -ŋ 운미를 갖는 글자를 고대 한국어 유음의 일종 *-L(*r 혹은 *l 중 하나)에 대응시켜 표기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원인에 대해서는 더욱 발전된 논의를 기다려야겠으나, 이러한 표기 관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sɛr 서부 고대 일본어의 한국어족 차용어 se “형”의 원어일 것입니다. 모든 판본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爪›는 해석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입니다만, 저는 ‹孚›의 약자로 가정하여 논의를 전개하겠습니다. ‹兄孚› *sɛrpɔ-는 중세 한국어 solp- “사뢰다”에 대응되는 고대 한국어 어간일 것입니다.

보빈과 달리 ‹湯›를 기각하고 ‹謁›를 원문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 자연성의 원리도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도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謁›은 그 자체로도 “뵈다, 아뢰다”의 의미가 있으나, 주모음과 개음이 중설 모음이므로 *ɛtɔ라는 고대 한국어 한자음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뒤따르는 ‹氣› *kɛs를 더하면 *ɛtɔk-이라는 어간이 얻어지고, 이는 중세 한국어의 ‹옅-› “여쭙다”의 기원일 것입니다. 따라서 센가쿠 주석서의 “물었다”에 대응하는 문자열은 ‹兄孚謁氣›일 것입니다.

소거법으로 남은 ‹大相七›은 “우러르고”에 대응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처음 보고 떠오른 생각은 고구려 관제 제3등인 대상大相입니다. 《한원翰苑》에는 대상의 이칭으로 울절鬱折이 제시됩니다. 여기서는 ‹大相›과 중세 한국어 wulGwel- “우러르다”의 가설적인 대응 가능성만을 제시하고 상술은 삼가겠습니다.

  • Vovin, Alexander. 2002. The Old Korean text in the Man’yōshū. In F. Cavoto, The Linguist’s Linguist: A collection of papers in honor of Alexis Manaster Ramer (pp. 455-460). Lincom Europa.
    • 2017. Man’yōshū (Book 1): A New English Translation Containing the Original Text, Kana Transliteration, Romanization, Glossing and Commentary. Brill.
  • 何華珍·胡伊麗(2021) 「韓國變異俗字類析」 『漢字硏究』 13(3): 131–14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