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부터 9월에 걸쳐 매주 토요일 19시에 NHK 라디오 제2방송에서 컬처 라디오 『漢詩を読む』「中国 古都の詩【華北編】」이 방송된다. 구성 및 해설은 國學院大學 赤井益久 교수에 의한 것으로,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NHK 텍스트로 출판된 것을 구입하고는 매주 청취하기로 하였다. NHK 라디오는 한때 내가 매일같이 즐겨 듣던 라디오 채널로서 잊고 있던 옛 취미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깊어져가는 가운데, 지금까지 찾은 적 있는 중국의 古都에 대한 이해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염려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번역의 문제이다. 漢詩를 평이한 한국어로 譯註하는 것은 감히 시도할 작업이 아니며, 형식적으로 釋讀하는 방편 또한 오늘날 그 전통이 끊겨 준거할 규범이 없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궁여지책으로 NHK 텍스트에 제시된 일본어 훈독문을(舊 가나 표기로 바꾸어)제시하고, 뒤이어 어설프게나마 한국어 간이譯을 제시하려고 한다. 또 하나는 끈기의 문제이다. 매주 네 首의 한시를 다루게 될텐데, 단순히 매주 라디오를 챙겨 청취하는 데 드는 수고는, 그 내용을 정리하고 번역하여 연재하는 작업에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의 양에 비견될 바가 못된다. 아무리 못해도 제4장인 成都까지는 진행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나, 고질적인 게으름 탓에 성취하기 쉽지 않지 않을까. 여하튼 이로써 첫 단추는 꿰었다.
향후 연재되는 글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NHK 라디오 2에서 방송되는 『漢詩を読む』「中国 古都の詩【華北編】」에 기반한다.

진나라의 수도――함양
戰國七雄 가운데 패권을 차지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秦이었으며, 秦始皇帝가 최초의 통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이전까지 周는 봉건제도를 통해 諸國을 통제했으나, 秦은 郡縣制를 도입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群雄割據의 분립에서 벗어나 중앙이 통치의 중심이 되는 국가로의 변화를 의미했으며, 이에 따라 수도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秦의 수도였던 咸陽은 천하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함양은 중국 문화의 요람인 周原과 中原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 도읍지로 적합한 평야와 풍부한 수자원을 갖춘 지리적 이점을 지녔다. 渭水 이북에 위치한 함양은 渭城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고, 渭水 위에 세워진 咸陽橋는 사람들의 왕래와 이별을 상징하는 명소가 되었다.
咸陽覽古
初唐・沈佺期——오언율시(上平・六魚)
千載坐盈虛
版築林光盡
壇場霤聽疎
野橋疑望日
山火類󠄀焚書
唯有驪峰在
空聞厚葬餘
沈佺期는 初唐의 시인으로, 字는 雲卿이다. 相州 內黃(오늘날 河南省 安陽市 內黃縣) 출신이며, 上元2년의 進士이다. 協律郞・通事舍人・考功員外郞을 역임했으나, 張易之의 죄에 연좌하여 驩州에 좌천되었다. 사면된 뒤에 修文館 直學士에 취임했다. 宋之問의 詩名과 나란히 「沈宋」이라고 倂稱된다. 律詩의 확립에 공헌했다.
「咸陽覽古」
「함양의 지난날을 그리다」
咸陽は秦帝の居
함양은 시황제의 거소이니
千載 坐ろに盈虛す
천 해 동안 하염없이 흥망을 되풀이했다
版築 林光盡き
토목을 벌인 임광궁*은 무너지고
*진 이세(二世)가 지은 이궁(離宮).
壇場 霤聽疎し
단장*은 낙수 소리마저 사라졌다
*흙을 높게 쌓아 지은 의례를 행하는 식장.
野橋 望日かと疑ひ
야교*에서 바라본 태양은 시황제가 본 광경**이라 의심하고
*시황제가 짓게 한 돌다리.
**시황제가 돌다리에서 일출을 보았다는 전설이 있음.
山火 焚書に類す
산불은 분서갱유를 닮았다
唯だ驪峰の在る有り
오직 여산만이 변함없이 있고
空しく聞く 厚葬の餘
장대한 장례*의 여운만이 무상하게 들려온다
*시황제는 즉위와 동시에 70여 만 명을 동원하여 능묘를 건설하였음.
咸陽은 중국 최초의 統一帝國인 秦의 도읍지이다. 始皇帝 시책은 봉건제도에서 군현제도로의 이행을 통한 중앙집권화, 法家의 중용, 도량형・문자의 정비, 長城 건설을 통한 對匈奴 정책, 남방의 제압 등 괄목한 만한 것이 많으나, 그러한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징용과 고역에 의해 민중의 반발이 강했고, 2대 5년만에 短命으로 끝났다. 때문에 후세의 시인이 시를 읊을 때 이러한 흥망을 개탄하는 작품이 많다.
咸陽城東樓
晩唐・許渾——칠언율시(下平・十一尤)
蒹葭楊柳似汀洲
溪雲初起日沈閣
山雨欲來風滿樓
鳥下綠蕪秦苑夕
蟬鳴黃葉漢󠄁宮秋
行人莫問當年事
故國東來渭水流
許渾은 晩唐의 시인으로, 字는 用晦 또는 仲晦이다. 潤州 丹陽(오늘날 江蘇省 丹陽市)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病弱하고 苦學하였고 자연을 애호했다. 大和 연간의 進士로, 當塗縣令・太平縣令・監察御史・睦州刺史・郢州刺史를 역임했다. 詩律이 교묘하고 登高懷古의 작품이 많다.
「咸陽城東樓」
「함양성의 동루」
一たび高樓に上れば 萬里の愁ひあり
한번 고루에 오르거든 만리의 수심을 자아내니
蒹葭 楊柳 汀洲に似たり
갈대와 버들은 정주*의 풍경과 닮았다
*강남을 가리킴.
溪雲 初めて起こつて 日 閣に沈み
계곡에 구름이 솟고 해는 누각 뒤로 잠기고
山雨 來らんと欲して 風 樓に滿つ
산비가 내리려 하니 바람이 누각을 채운다
鳥は綠蕪に下る 秦苑の夕べ
새가 녹무*에 내려앉는 진나라 정원의 저녁무렵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
蟬は黃葉に鳴く 漢宮の秋
매미가 단풍 위에서 우는 한나라 궁전 터*의 가을철
*한대(漢代)의 장안성(長安城)을 말함.
行人 問ふこと莫かれ 當年の事
나그네여 왕년의 일은 묻지 말아다오
故國より東來して 渭水流る
진나라의 옛 도읍에서 동쪽으로 나와 위수는 의연히 흐르고 있으니
秦의 도읍지인 咸陽은 渭水를 끼고 長安의 서북녘에 있었다. 본 시는 그 古城에 있는 東樓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登高遠望의 작품이다. 登高遠望의 시는 懷舊와 鄕愁를 읊는 작품이 많다. 頸聯(제5구와 제6구)의 對句에서 「鳥下綠蕪秦苑夕 蟬鳴黃葉漢宮秋」와 같이 읊은 것은 榮華를 과시하던 秦漢帝國조차 멸망하고, 지금은 渭水만이 변치 않고 흐르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懷舊의 감개가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頷聯(제3구와 제4구)의 對句가 실로 교묘하다.
咸陽
晩唐・李商隱——칠언절구(下平・五歌)
六國樓臺艷綺羅
自是當時天帝醉
不關秦地有山河
李商隱은 晩唐의 시인으로, 字는 義山, 號는 玉谿生이다. 懷州 河內(오늘날 河南省 沁陽市) 출신이며, 독창적인 발상과 典故를 多用한다. 沈鬱함과 優美함을 아울러 갖춘 詩風은 晩唐을 대표한다. 溫庭筠과 나란히 「溫李」라고 倂稱된다.
「咸陽」
「함양」
咸陽の宮闕 鬱として嵯峨たり
함양의 궁궐 울창하고
六國の樓臺 綺羅 艶かなり
自づから是れ 當時 天帝醉ひ
秦地に山河有るに關はらず
始皇帝는 멸망시킨 여섯 나라의 누각을 모방하여 咸陽 北阪에 건축하였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를 幽閉시켰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협소해진 咸陽宮과 별개로, 渭水 이남에 있던 上林苑에 參內키 위한 궁전인 아방궁을 造營했다.
古築城曲四首 其三
南宋・陸游——오언절구(下平・四豪)
千步堀城壕
咸陽三月火
始悔󠄀此徒勞
陸游는 南宋의 시인으로, 字는 務觀, 號는 放翁이다. 越州 山陰(오늘날 浙江省 紹興市) 출신이며, 蘇軾과 나란히 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詩風에서는 아비로부터 애국 사상을 계승하여 적국인 金에 대한 對抗心과, 동시에 평온한 일상을 중시했음이 드러난다.
「古築城曲四首 其の三」
「고축성곡 4수의 3」
百丈 築城の身
백 장*에 이르는 성곽을 쌓는 몸
*약 300미터. 1장(丈)은 약 3미터.
千步 城壕を堀る
천 보*에 미치는 해자를 판다
*진 도량형의 1보(步)는 약 5척(1.5미터).
咸陽 三月の火
함양의 아방궁은 다 타는 데만 세 달이 걸리니*
*항우에 의해 불태워진 아방궁은 전소되기까지 3개월이나 걸렸음.
始めて悔ゆ 此の徒勞
비로소 이 헛된 수고를 후회했다
일반적으로 築城曲이라고 하면 북방 이민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지은 萬里長城의 노래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 시는 「城壕」「咸陽」「三月火」로부터 上林苑에 지어진 아방궁의 건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