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거란어학 활성화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김태경金泰京 소장의 저서 《거란문자: 천년의 역사, 백년의 연구》(2022)는 한국어 독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거란어학 입문서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때에 저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외출을 나가서 구입하여 부대 안에서 읽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책은 거란어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과 연구사, 또 연구자들이 겪은 소소한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자칫 따분할 수도 있는 주제를 흥미롭게 다루었습니다. 특히 권말 부록에 있는 탁본 이미지는 무척이나 유용합니다.
그러나 간혹 이 책에 드러난 김태경 소장의 사견 중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𘮧𘰗𘮚 pülügʷ “여분의”에 관해서는 이미 제 책(향문천 2024:94–97)에서 지적한 바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른바 《낭군행기》 제5행의 마지막 글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보고자 합니다.
김태경(2022:211–212) 소장은 해석에 논란이 있다고 여겨지는 《낭군행기》 제5행의 마지막 글자 𘮧𘯶𘯎 [*p.o.on](김태경 소장에 의함)이 실은 거란어가 아니라 여진어 [fo.on](진치충에 의함)이며, 진치충金啓孮의 《여진문 사전》(1984:76)을 인용하여 “새기다”라는 의미라고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되었습니다.
먼저, 여진어 [fo.on]에 “새기다”라는 뜻은 없습니다. 진치충의 사전에는 분명 “fo-on 刻”이라는 뜻풀이가 있습니다만, 여기에 나오는 刻은 시간 단위의 일종으로, “새기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거란어 𘮗 poo “때,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낭군행기》는 금나라 시대의 거란어 자료이긴 합니다만, 김태경 소장의 주장은 “刻”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억측입니다. 𘮧𘯶𘯎 booň은 다소의 의문은 남으나 계사繫辭의 과거 여성형임이 틀림없습니다.
거란어의 계사는 중세 몽골어의 bö- ~ bü-와 마찬가지로,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는 bɵɵ- 어간을 취하고,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는 bu- ~ bə- 어간을 취합니다(오타케 마사미 2020:479). 그러나, 거란어의 과거 여성형 어미 -əəň은 모음으로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낭군행기》에 실제로 문증되는 형태는 booň인 것입니다.
마지막 글자를 계사의 과거 여성형으로 간주했을 때의 해석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가 천회天會12 갑인년 중동仲冬 14일이었다.
부록으로 거란어 계사의 곡용 패러다임을 붙입니다.
- 비과거 “…이다”
- 단수: 𘮽𘲚 ~ 𘮧𘲚 buu
- 복수: 𘲷 bur
- 과거 “…이었다”
- 남성: 𘮽𘲓𘱦 ~ 𘮧𘲓𘱦 bɵɵr
- 여성: 𘮧𘯶𘯎 booň
- 복수: 미상
- 조건 “…이라면”
- 𘮽𘭌 ~ 𘮧𘰕 bu-ň ~ bə-ň
- 동시 “…이면서”
- 𘮽𘲓𘭢 ~ 𘮧𘲓𘭢 bɵɵl
- 양보 “…이지만”
- 𘮽𘭌𘱦 ~ 𘮧𘰕𘲫 bu-ňəər ~ bə-ňər
이상의 제형태는 과거 여성형을 제외하고 오타케 마사미(2020:479–480)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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