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인용을 달지 않은 내용은 {櫻井隆|사쿠라이 다카시}(2015)『{戦時下のピジン中国語|전시 하의 피진 중국어}』를 참고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所謂|소위} {協和語|협화어}의 시작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국가인 {滿洲國|만주국}에서 시작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일본인은 20세기 초 {日露戰爭|일러전쟁}(승전국을 앞에 기재함이 이치에 맞다) 이후에 이미 중국 동북 지방에 진출하였고, 이로부터 일본어와 중국어의 언어접촉은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일찍이 피진{語|어}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日淸戰爭|일청전쟁}(1894–1895) 때부터 {終戰|종전}(1945)까지 반 세기 동안 사용된 피진어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 거주했던 {日人|일인}들 사이에서 정칙적인 중국어 사용이 보편화되거나, 해당 피진어가 크레올{化|화}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日|일}·{滿|만} 통혼은 거의 없었고 크레올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家庭|가정}에서 {보이|심부름꾼}를 부리던 일본인 집안에서는 {幼兒|유아}가 일본인 부인과 보이가 주고받는 대화에 영향을 받아 피진어스러운 발화를 한 사례에 관한 기록은 있다.
「협화어」의 발생 배경
당초에 일본인은 주로 {南滿洲|남만주}의 {關東州|관동주} {大連|대련}으로부터 {長春|장춘}까지를 잇는 {南滿洲鐵道|남만주철도} {沿線|연선} 도시의 철도 {附屬地|부속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는데, 현지 주민과의 언어 접촉이 빈번히 발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協和語|협화어}」는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이 중국 대륙 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어 학습에 노력을 들이지 않았기에 발생한 산물이다.
{義和團事變|의화단 사변} 때도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사관 및 군인들은 자국어를 구사하여 소통을 시도한 데 반해, 일본인들만 유독 서투른 중국어로 소리치며 일본어의 사용을 꺼렸다(原口, 1938:3). 일본인들이 타지에서 자국어 대신에 구태여 상대국의 언어를 쓰고자 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일본인들의 행동 심리가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발생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중국 대륙에 거주하게 된 일본인들은 중국어를 제대로 배울 생각조차 없었음에도 일본어 사용을 밀어붙이지도 않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이로써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탄생한 것이다. {日人|일인}들이 {滿洲|만주}와 {支那|지나}에 {入植|입식}되고, 또 {滿州傀儡國|만주 괴뢰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발전했다. 무력에서 제압한 땅에서 일본인과 일본군은 기이하게도 상대의 언어를 쓰려고 한 것이다.
1939년 기록에 따르면, {滿洲事變|만주사변} 이래 중국 대륙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滿洲語|만주어}」 단어를 마흔 내지 쉰 개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高木, 1939:34). 참고로 1938년에 {學制|학제}를 개편하면서 중국어를 「{滿洲語|만주어}」라고 칭하기 시작했고, 실제 {滿州族|만주족}의 언어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만주어는 「{固有滿洲語|고유 만주어}」라고 칭하여 구별하였다(張, 2011:52). 중국어를 잘 모르면 지배자로서 당당히 일본어를 써도 됐을 텐데, 상대방이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서투른 「만주어」 단어를 나열하며 말했기 때문에, 오히려 {滿人|만인}들이 일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高木, 1939:34). 재미있는 것은, 어휘력이 하찮아서 피진어 문장을 성립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저 대화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때 거부할때 쓰는 말은 「{沒有|メイユー}」와 「{不要|プヨー}」였다. 石原(1938:434)의 「{川柳と滿洲|센류와 만주}」에는 다음 {川柳|센류} 구절이 소개된다.
メイユウとプヨウで通し留守の妻 亞鳳
{彼此|피차} 소통에 지장이 현저했음에도 일본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은 원인에 대하여 中谷(1925)는 「{歐美崇拜|구미숭배}」「{中國蔑視|중국멸시}」 등의 감정이 작용한 것을 지적했다.
{一方又|또 한편,}「{ハイカラな|“구미식}{横文字なら|가로 문자라면}{習ふ気に|배울 마음이}{なりますが|들겠지만}、{支那語では|지나어는}{ねー|그닥”}」{と|이라며}{尻込みして、|꽁무니 빼고}{自分の家で|자기 집에서}{使つてゐる|부리는}{支那人に對し|지나인에게}{滿足に|제대로}{用事を|일을}{吩咐ることすら|시키지도}{出來ない|못하는}{奥さんが|부인이}{多いと云ふ|많다는}{有り様|실정.}。
『{滿洲日日新聞|만주일일신문}』 (中谷, 1925.02.11.)
처음 {滿洲|만주}에 오면 중국어 학습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개인 교사를 찾거나 {興亞學院|흥아학원} 야간부에 다니기 시작하여도, 길어봤자 3개월이면 때려친다는 기록이 있다(篠原, 1940:74). 이처럼 일본인들이 제대로 된 중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았기에 피진어만 주구장창 발달했다. 40년대쯤 되면 일본어를 조금 하는 {漢人|한인}들이 늘어나면서 피진어로 대화하다가 답답한 나머지 아예 일본어로 대화를 해치워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출세하려면 일본어를 교양으로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발전하면서,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漢人|한인}이 늘어난 탓이다.
「협화어」라는 용어
「{協和語|협화어}」라는 용어는 중국 {東北|동북} 지역에 진출한 일본인의 영향으로 생겨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해당 피진어를 가리킴에 있어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定義|정의}가 불명확하며, {戰前|전전} 일본 자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安田, 1995:95–96). 「{協和語|협화어}」는 {終戰|종전} 즈음에 중국 측에서 발생한 용어이다.
일본 측에서는 {戰前|전전}부터 다양한 용어를 통해 기이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일컬어왔는데, 「{沿|연}{線|선}{滿|만}{語|어}」「{日|일}{支|지}{合|합}{辯|변}{語|어}」「{日|일}{滿|만}{合|합}{辯|변}{語|어}」「{日|일}{滿|만}{親|친}{善|선}{語|어}」「{日|일}{滿|만}{ちゃんぽん|짬뽕}{語|어}」「{兵|병}{隊|대}{支|지}{那|나}{語|어}」 등 일관성 없게 그때그때의 수요에 따라 말을 만들어 썼다. 이들은 끝내 뿌리내리지 못하고 현대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協和語|협화어}」라는 용어가 中·日 {兩國|양국}에서 정착했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協和語|협화어}」라는 용어는 당연하게도 일본과 중국의 {協和|협화}, 즉 협력과 화합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오히려 얄궂게도 {滿洲國|만주국} 내에 결성된 「{協和會|협화회}」에 관여한 {漢奸|한간}들, 즉 {漢人|한인}의 배신자 무리를 비꼬기 위해 나온 표현으로서 모멸적인 {語感|어감}을 갖는다. 이는 중국 국내에서 {黨派|당파}와 정치 신조를 불문하고 만주국을 {僞滿洲國|거짓 만주국}이라고 부르듯이(張, 2011:51), 「{協和語|협화어}」는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언어 상에서 표출된 사례이다. 중국 측 증언 기록에는 「{協和|협화}」의 본뜻을 「{協助大和|야마토에 협조하다}」의 의미로 비트는 당시의 우스갯소리도 전해진다.
유형
뚜렷한 정의 없이 두루뭉술하게 다뤄져온 「{協和語|협화어}」의 개념을 {櫻井|사쿠라이}는 「{滿洲|만주} 피진 중국어」「{兵隊|병대} {支那語|지나어}」「대륙 피진 중국어」로 각각 명명하여 구분을 꾀했다. 또한 {櫻井|사쿠라이}는 이들의 통칭으로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Wartime Pidgin Chinese)라는 용어를 제안하였고, 이 글에서도 해당 용어를 사용한다.
만주 피진 중국어
{櫻井|사쿠라이}에 의한 영문 명칭은 Manchurian Pidgin Chinese. {舊|구} {滿鐵|만철} {沿線|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피진이다. 현지인과 상호 간에 「대화」하기 위해 쓰였으며, 기본적으로 중국어를 바탕으로 하되 몇몇 어휘와 어순은 일본어식이다. 음운체계는 일본인이 발화할 경우에는 일본어와 같다. 주로 {滿洲|만주}에 파견된 공무원이나 병사의 부인들이 장을 보러 나가거나 인력거를 탑승할 시에 썼으므로 여성에 의한 용례가 많다. 발화 사례를 보면 가게에서의 흥정, {洋車|인력거} 이용, {심부름꾼|ボーイ}과의 소통 장면이 많다.
중국인들도 이 언어를 자연스레 익혀 썼는데, {滿洲|만주}에 처음 도착한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이 몹시 무례한 일본어를 쓰는상황을 보고 충격을 먹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 원인은 {在中|재중}·{在滿|재만} 일본인들이 평소에 남녀노소 중국인을 향하여 폭언을 들이부으며 상대해왔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것이 정칙적이고 아무런 문제 없는 일본어인 줄 잘못 알고 있던 것이다. 일본 부인들도 무례하고 거친 일본어가 포함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는데, {兒女子|아녀자}가 어찌 저런 천박한 입놀림을 하냐며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중국어에 {倭製漢語|일본제 한자어}가 대량으로 유입되었으며, {滿州國|만주국} 시절에는 「{股份|고분}」「{公司|공사}」 대신에 「{株式|주식}」「{會社|회사}」를 쓰도록 하는 등, 제도적으로 중국어 한자어를 일본어 한자어로 대체하도록 규범화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國語醇化|국어순화}」 운동과 비슷하게, {戰後|전후} {中共|중공}은 「{殘滓|잔재}」 어휘를 배제하는 사업을 벌여야 했다.
병대 지나어
{櫻井|사쿠라이}에 의한 영문 명칭은 Soldier Chinese. {滿洲|만주}와 {支那|지나}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이 현지 주민에게 일방적인 명령을 내릴 때 쓰던 피진어로, {日支合弁語|일지 합변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兵隊俗語|병대 속어}가 포함되어 있다. 주로 민간인에게 지시를 내릴 때, 현지 주민에게 물건을 빌릴 때, 식사를 하러 식당가에 갈 때, 길거리에서 여성을 겁탈할 때 사용되었다. 일본군이 「{飯々進上|メシメシシンジョー}」라고 말하면 중국인은 대개 식사를 대접해왔고, 총으로 위협하며 「{屄看々|ピーカンカン}」이라고 말하면 아무 여성은 옷을 벗어 {秘部|비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명령투이며 상호 간에 동등한 입장을 전제로 한 피진은 아니었다.
{兵隊支那語|병대 지나어}는 일본인 병사끼리 언어유희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었으며, {櫻井|사쿠라이}는 이 경우는 피진이 아니므로 {兵隊俗語|병대 속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尾川(2003:47–48)에 의하면, 일본어의 「{ざまあみろ|꼴좋다}」의 「{みろ|보라}」를 중국어 「{看看|보다}」로 치환한 「ざまあ{看々|カンカン}」, 「최고의 행운·만족」을 의미하는 「{頂好|テンホー}の最高」, 「바보」라는 뜻의 「{腦天壞了|ノーテンファイラ}」 등은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사용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頂好=天寶|テンホー}」「{腦天|ノーテン}」은 각각 「太好・頂好」「腦袋」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진다.
{兵隊俗語|병대 속어}의 일부는 병사들이 중국을 떠나 귀국하여 일본 국내에 재배치되면서 일본 육군 전체에 전파되었다. 예컨대 {慰安婦|위안부}를 지칭하는 속어 「ピー」는 중국어로 {女陰|여음}을 뜻하는 비속어 「{屄|비}」가 어원이며, 1943년에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일본의 만화가 {水木しげる|미즈키 시게루}의 회고에 따르면, 오키나와 출신 종군위안부는 「{沖繩ピー|오키나와 비}」, 조선인 종군위안부는 「{朝鮮ピー|조선 비}」라고 불렸다고 한다. 명백하게 중국 전선 및 {滿洲|만주}에서 통용되었던 {兵隊俗語|병대 속어}의 영향이다.
대륙 피진 중국어
{櫻井|사쿠라이}에 의한 영문 명칭은 Continental Pidgin Chinese. {滿洲|만주}를 제외한 {支那|지나} 지역에서 쓰였던 것이다. 아래의 「지역 변종」 문단을 보라.
인식
중국인들의 인식
흔히 「{協和語|협화어}」라고 하는 용어는 {戰前|전전} 일본 문헌에서는 단 한 건도 사용된 적이 없고, 1940년 초중반에 중국 문헌에서 간간히 나오는 정도였다. 이는 {協和語|협화어}가 본래 현지 중국인들에 의한 비아냥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용어였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協和語|협화어}는 일본이 만주에 설치한 {協和會|협화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인들이 {日支合弁語|일지 합변어}를 폄훼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協和語|협화어}」라는 용어를 쓰는 맥락에는 모멸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滿州國|만주국} 시기에 「{思想不良|사상 불량}」「{皇宮遙拜|황궁 요배}」「{絶對服從|절대 복종}」「{勤勞奉仕|근로 봉사}」와 같은 표현이 중국어에 유입되면서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거듭 서술하게 되나, 애초에 현대 {中共|중공}에서는 {滿州國|만주국}을 일관되게 「{僞滿州國|거짓 만주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발전한 {協和語|협화어}에 대해서는 부정적 서술로 일관하는 경향이 보인다. 「{協和|협화}」에 대하여 「{協|협}{とは|은}{協助|협조}、{和|화}{とは|는}{大和|야마토}」 즉, 「야마토 민족의 중국 침략을 원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함은 앞서 이미 언급하였다(山室, 2004:284).
자세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協和語|협화어}」는 나중에 일본에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지칭하는 대표 용어로 정착했고, 현대에도 거의 항상 이같이 불리운다.
일본인들의 인식
{在中|재중} 일본인들 대부분은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가 실제 정칙적인 중국어인 줄 알았으나, 중국어를 전문적으로 이해한 소수의 일본인들은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못마땅히 여겼다. 그러나 중국인처럼 모멸적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보다는, 그저 학술적 관점에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만연함이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고, 굳이 말하자면 일본인들이 엉터리 중국어를 써서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자존심이 상하게 되므로, 제대로 된 중국어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低俗|저속}한 표현이 많았고, 종종 무례하고 거칠게 들리는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주요 사용자는 살림살이를 하는 일본인 부녀자들이었기 때문에, {滿洲|만주}에 갓 도착한 일본인들이 어찌 부녀자가 저리 천박하게 입을 놀리냐며 당혹감을 드러내는 기록이 존재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있는 그대로 {記述|기술}한 학자는 전무하다시피 하였고, 당시 파병된 병사들의 일기와 회고록, 군사 우편에 사용된 몇 가지 예를 통해서나마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비판하면서 정칙적인 중국어를 교육하는 中谷螢光生(=中谷鹿二)「正しき支那語の話し方と日支合辨語の解剖」 및 中澤信三「兵隊支那語より一步前進」의 칼럼 연재나 中谷鹿二『日支合辨語から正しき支那語へ』 등에서 언급되는 엉터리 중국어 문장이 그나마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몇 되지 않는 학술적 {記述|기술}로 간주할 수 있다.
언어적 특징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문법과 어휘는 대체로 중국어 기반이지만, 일본인이 발화할 경우 발음은 일본어식이다(中尾, 1990:247–248).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비롯하여 피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흔한 특징은 {疊語|첩어}일 것이다. 일본인 병사건 중국인이건 할 것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떄는 「カイロカイロ」라고 말한다. 병사들은 일본어 「{歸らう|돌아가자}」의 발음이 와전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지만, 실제로는 「길을 트다」「돌아가다」라는 뜻의 중국어 「{開路|카이루}」에서 기원한다. 역사가 상당히 오랜 표현인 「サイコサイコ」는 「성교」를 의미하며, 『{滿洲日日新聞|만주일일신문}』 1909년 6월 14일자 기사에서도 지적되듯 일본어 「{さあ行かう|자, 갑시다}」의 와전으로 추측된다. 森金(1978:42)에는 중국인 위안부가 이 말을 사용하는 용례가 나온다.
{你|ニー}、{快々的|カイカイデ}ね。{慢々的|マンマンデ}{不行|プシン}よ!
{我的|オデ}、{每天|メイテン}々々{先生|シーサン}{二十箇|リヤンスコ}{人|レン}サイコ、{死了|スーラ}{一樣|イーヤン}よ!!
「당신 천천히 하지 말고 서둘러라! 나는 매일 {선생|シーサン} 스무 명을 상대한다. 죽겠다!!」
長沢(1983)의 증언에 따르면, 병사들은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고 끝에 {的|デ}를 붙이면 중국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느 {將校|장교} 당번이 중국인 채소 장수에게 「{長い長いデー|긴 것}、{青い青いデー|파란 것}、{いぼいぼデー|울퉁불퉁한 것}、{くれ|줘}」라고 하니 오이를 건네받았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전한다(長沢, 1983:194).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를 연구하는 {張守祥|장서우샹}(2011:63)에 의하면, 일본인에 의한 「{的|デー}」의 남용은 {戰後|전후} 66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중국 東北 지방에서 농담거리로 소비되곤 하였다. 그의 고향인 {黑龍江省|헤이룽장성}에 거주하는 노년층의 발화에서, {滿州國|만주국} 시절에 만연했던 언어 습관의 연장선에 있는 「你的良心大大地不好」「你的良心壞了壞了地」「我的回家,你的幹活」「你的什麼的幹活」「統統的不行」 등의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張, 2011:68).
앞선 표현에서 나타나는 「我的」「儞的」는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에서 특징적인 인칭대명사이다.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범용적인 1인칭 단수 「{我的|オーデ}」 및 2인칭 단수 「{儞的|ニーデ}」 대명사는 정칙적인 중국어에서는 「我」「儞=你」에 소유의 {助詞|조사} 「的」가 부가된 꼴로 분석되어 「나의」「너의」의 의미로 한정되어 쓰인다.
피진임에도 불구하고 발화자 간의 상하관계가 뚜렷하다보니 호칭 체계는 제법 복잡하게 형성되었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부를 때는 「{儞呀|ニーヤ}」「{儞|ニー}」「{儞公|ニーこう}」라는 호칭이 쓰였다. 이때 「{儞呀|ニーヤ}」는 그 자체로 「중국인」을 의미하였으며 모욕적이거나 차별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반면 중국인이 일본인을 지칭할 때는 「{掌櫃(的)|チヤングイ(デ)}」라고 하며 본뜻은 「상점가의 지배인」이다. 한국어의 중국인에 대한 멸칭인 「짱깨」의 어원으로 지목되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인이 일본인 기혼 여성을 지칭할 때는 「{歐庫桑|어우쿠쌍}」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본어에서 「부인」을 높여부르는 「{奥さん|오쿠산}」을 차용한 것이다. 중국인이 일본인 장교를 지칭할 때는 「{先生|シーサン}」「{大人|たいじん}」이라고 하였으며, 모두 상대를 높이는 표현이다. 일본어 「{大人|たいじん}」은 중국어의 「{太君|타이쥔}」과 발음이 흡사하여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에서 「{だ|다}」가 나올 자리에 「{アル(ヨ)|아루(요)}」가 나오는 문체를 실존했던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말투의 실제 용례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본어와 영어가 {混淆|혼효}된 {橫濱|요코하마} 피진의 arimas 말투에 영향을 받아 후대에 만들어진 「{役割語|역할어}」일 가능성이 있다. 「{よろし|요로시}」도 마찬가지.
{アルヨ|아루요} 문체는 일본의 {大正|다이쇼}부터 {昭和|쇼와} 연간의 대중예능에서 「중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役割語|역할어}로서 {架空|가공}의 문학적 장치로서 활용되었다. {アルヨ|아루요}가 들어간 「{協和語|협화어}」는 가상의 언어이며, minerva scientia의 {可笑|가소}로운 발화 영상 및 나무위키 뇌피셜 문서의 망상과 달리 실제로 사용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가 아니다. 「{協和語|협화어}」의 문장으로 제시된 {少數|소수}의 {アルヨ|아루요}{文|문} 용례는, 모두 작가의 상상과 작위된 고정관념에 기반한 것이다. 일본어식 {文末詞|문말사}는 「{ぢやないか|・・・지 않은가}」 정도가 고작이다. {文末詞|문말사}로서 「{有|ユー}」「{沒有|メイユー}」를 붙이는 표현은 비교적 흔히 쓰였고 中谷(1925 & 1926)에서도 {記述|기술}되었다. 후자의 경우 「{來々沒有|ライライメイユー}」「{進上沒有|シンジョーメイユー}」 등 부정문에서 쓰인다. 이처럼 {文末|문말}에 「有」「沒有」와 더불어 「好」를 붙이는 말투가 오히려 허구의 {アルヨ|아루요} 말투에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櫻井|사쿠라이}(2015)에서 지적되었고, 이들을 「{直訳的アルヨ言葉|직역적 아루요 말투}」라고 칭한다. 관련성이 다소 떨어질 수 있으나, 같은 알타이{諸語|제어}의 일원인 몽골어에 영향을 크게 받은 {元代|원대} {漢兒文|한아문}에서 문말에 「有」가 첨가되는 현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口語|구어}이지만, {紙面|지면}에 나타날 경우에는 한자와 가나 문자로써 표기된다. {漢字|한자} 위에는 읽는 법을 가나로 치는데, 보통 「들리는대로」로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 규범적인 {滿洲|만주} 가나를 활용한 사례도 존재한다. 또한 {漢字|한자} 표기에 있어서도 실제 중국어에서 쓰이는 표기 대신에 일본어 발음을 고려한 대안 표기 혹은 중국어 발음을 혼동하여 잘못된 한자를 끌어쓰는 표기가 종종 쓰였다. 「{小孩|샤오하이}」 대신에 「{小輩|ショーハイ}」, 「{頂好|딩하오}・{太好|타이하오}」 대신에 「{天寶|テンホー}」, 「{大大的|다다더}」「{統統的|퉁퉁더}」 대신에 「{多々的|ターターデ}」「{都々的|トントンデ}」라는 표기가 그러하다.
같은 단어여도 작성자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중국인이 일본인 장교를 지칭할 때의 호칭 「{大人|たいじん}」은 일본인에 의한 표기이고, 중국측 자료에서는 「{太君|타이쥔}」이라는 표기가 나타난다. 「식사」를 의미하는 「{飯々|めしめし}」는 중국측 자료에서 「{米西米西|미시미시}」로 표기되어 나타난다.
지역 변종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는 {滿洲|만주}, {北京|북경}, {天津|천진}, {上海|상해} 등지에서 {變種|변종}이 사용되었다.
{滿洲|만주}에서 {慢々的|マンマンデ}는 「멈춰!」라는 의미로 통했지만, {北京|북경}에서는 「천천히」라는 뜻으로 오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칙적인 중국에서 {慢慢地|만만디}의 본래 의미는 「천천히」가 옳다. {上海|상해}에서는 {慢々的|マンマンデ} 대신에 {慢々敎|メメチョ}(?)가 쓰였다.
{滿洲|만주}와 {北京|북경}에서는 「인력거」를 {洋車|ヤンチョー}라고 했으나, {天津|천진}에서는 {膠皮|チョーピー}라고 하였다. {膠皮|교피}의 본래 뜻은 「고무」인데, 아마도 「타이어」에서 와전된 게 아닐까 추측된다. {上海|상해}에서는 「인력거」를 {黃包車|ワンパオチョー}라고 하였다.
현대에도 어원이 분분한 일본어의 {餃子|교자}는 당시 사람들도 왜 {チャオズ|자오쯔}가 아니라 {ぎょうざ|교자}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음은 상해에서 사용된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예문이다.
『{あなた馬鹿ツ|바보야}、{カントンピー|광둥 창부와}、{四馬路野鴨|쓰마루 창부를}{一しよするヤヤウ|똑같이 취급하지마}、{カントンピー|광둥 창부는}{二十仙も|20선이어도}{よろしいな|괜찮지만}、{四馬路の|쓰마루의}{野鴨ホレシ|창부는}、{四元|4원도}、{たかくないな|비싸지 않다}』
『{高い高い|비싸다}{二元|2원이면}{よろしい|된다}』
『{二元|2원은}{わるい|안된다}、{四元よろしいな|4원이다}、{あなたはやくとまる|어서 여기에 묵어라}』
『{いやだ|싫다}、{わたし歸る|난 돌아가겠다}、{わたし内|내 아내가}、{ニヤニヤマンマンチヨや|기다리고 있다}』
『{エーイ|에이}、{ニヤニヤ、マンマンチヨ|아내가 기다려도}、{プヨチンや|상관없다}』
『{ハゝゝ|하하하}{内に|집에}{嬶が|마누라가}{待つとつても|기다린대도}{關はんと|상관없다고}{言ふわい|하는구나}』
(池田, 1922:159)
예문
재미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예문을 위주로 살펴보자. 체계성이 떨어지는 피진을 글로싱하는 행위에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이적으로 현대 중국어 및 일본어에 기반한 유사 글로싱을 마련했다. 편의를 위해 원문이 한자가 아니어도 한자로 변환하여 제시한다. 또한 발음의 경우 원문에 제시된 표기를 인용하되, 중국어 유래의 표현은 가타카나로, 일본어 유래의 표현은 히라가나로 변환하여 시각적인 구별을 꾀했다.
「배 껍질을 깎으라」
「무의 이파리를 떼라」
예문 (1)과 (2)에서 사용된 「배의 옷」「무의 머리카락」과 같은 은유적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사흘 뒤에 왔으면 한다」
예문 (3)은 {滿洲|만주}에 놓인 {滿蒙開拓靑年義勇隊|만몽개척청년의용대}의 {一面披|이몐피} 훈련소에서 대원들에게 「{滿洲語|만주어}」를 강연하던 때에 언급된 발화 사례이다. {大佐|대좌} 계급의 {某|모} 간부가 현지 농부에게 사흘 뒤에 와달라는 뜻을 전하는 장면에서, 정칙적인 중국어로 「사흘 뒤」를 제대로 말할 수 없어 손가락을 접으며 「내일, 내일, 내일, 세 개 내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전해들은 대원들은 크게 감심하였다고 한다.
「네가 내 발을 밟아서 아프다」
예문 (4)는 {滿洲國|만주국}에서 {司法部|사법부} {刑事科長|형사과장}과 {總務廳|총무청} {弘報處長|홍보처장} 등을 역임한 관료인 {武藤富男|무토 도미오}의 회고록에서 나온 발화 사례로, {滿鐵|만철} 부속지에 거주하던 어느 일본 부인이 현지 부인에게 발을 밟힌 때에 「밟다」를 말할 수 없어서 「2층 만들다(하다)」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너희 모두 해고한다」
{日露戰爭|일러전쟁} 당시에 일본군 장교가 중국인 {馬賊|마적} 등을 조직한 비정규 부대인 {滿州義軍|만주의군}의 {花田|하나타} {少佐|소좌}가 도태된 병사를 해고하려고 한 때에 대원들에게 줄을 서게 하고 예문 (5)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중대한 해고 통보를 단 한 마디의 어설픈 문장으로 해치운 것이다. 정칙적인 중국어로 「해고하다」를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에 해고당한 대원들은 당시 중국인 특유의 말버릇인 「{沒法子|어쩔 수 없다},{沒法子|어쩔 수 없다}」를 외치며 해산하였다고 한다. {戰時|전시} 피진 중국어의 「トントン(デ)」에 「都々」라는 한자를 붙인 것도 「{協和語|협화어}」스러운 특징이다.
「빨리 빨리」
「아이고! 사모님 무겁다」
「맞다, 너도 고생이 많겠구나. 내가 돈을 많이 주겠다.」
일본 부인은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외출할 때에 {洋車|양차}라는 인력거를 자주 이용했다. 이 인력거는 당연히 중국인이 끌었는데, 속도가 더디어 답답해진 나머지 일본인 부인은 예문 (6)과 같이 재촉하였다. 예문 (7)은 {洋車|양차}를 끌던 제법 늙은 중국인이 「{哎呀|아이야}!」하고 비명을 지르며 무겁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어를 섞어 「{肉|にく}」, 즉 「살」이 많다고 호소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대단히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일본 부인은 개의치 않고 예문 (8)과 같이 그를 격려한다.
「이봐, 곤약 없느냐」
「이봐, 이 무는 바람이 들어서 못쓰겠다」
예문 (9)는 곤약을 중국어로 말할 줄 몰라 「두부와 같은데 조금 더 딱딱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예문 (10)은 무에 바람이 들어서 구멍이 생긴 것을 「터널이 많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9)와 (10)은 실로 다양한 문헌에서 언급되는 「{協和語|협화어}」의 우스꽝스러운 문장으로서, 실제로 발화된 적이 있는 문장이 아니라 스테레오타입{化|화}된 캐리커처일 가능성이 지적된 바 있다.
출전
尾川正二(2003)帝国陸軍の教育と機構』新風舎
山室信一『キメラ―満州国の肖像(増補版)』中公新書
森金千秋(1978)『悪兵―日中戦争最前線』叢文社
石原巌徹(1938)「川柳と滿洲」滿洲文話會『滿洲文藝年鑑』奉天:429–435
篠原次郞(1940)「北京の日本語敎育」國語硏究會(編)『國語敎育』5:74–77
安田敏朗(1995)「「満州国」の「国語」政策[下]」『しにか』:6(11):95–96
櫻井隆(2015)『戦時下のピジン中国語』三元社
原口統太郎(1938)『支那人に接する心得』實業之日本社
張守祥(2011)「「満洲国「における言語接触」『人文』10:51–68
長沢健(1983)『漢口慰安所』国書刊行会
池田桃川『續 上海百話』日本堂
中尾佐助(1990)『分類の思想―思考のルールをつくる』朝日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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