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난고/기행

미야코섬 여행 (1) – 프사라 역사·문화 기행

반응형
영상 내레이션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글이므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본 국내에서도 “요즘 화제의…”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관광지인 미야코섬宮古島. 오키나와현에 속하는 미야코섬은 푸른 산호초가 아름다운 남방의 망망대해 위에 자리하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오키나와의 아류일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야코는 문화적·언어적·정서적인 측면에서 오키나와섬과 판이하게 다르고, 류큐왕조 내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역사를 가졌으며, 시야를 미야코 열도로 좁혀 보아도 다양성이 넘치는 매력적인 지역입니다.

다라마섬은 생략.

 

여태껏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미야코섬의 인기가 치솟는 와중에, 한국에서도 2024년 5월 29일부터 저가 항공사 진에어의 서울↔미야코 직항선이 취항하면서, 국내에서도 미야코 열풍이 다가올 것이 기대됩니다. 이제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도 서울에서 곧바로 미야코섬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 여름에 바다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이 기사를 참고해보시기를 권해봅니다. 직항편 취항에 따라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기에 앞서 미야코섬의 관광 로케이션을 미리 둘러보는 것이 이번 기사의 취지입니다.

 

하네다 공항에서 미야코섬에 위치한 미야코 공항까지 직통으로 이동하면 무척이나 편리하겠지만, 미야코섬에 위치하는 미야코 공항에는 저가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도쿄에서 출발하여 스카이마크SKYMARK 항공편을 타고 미야코 공항 대신 시모지 공항에 착륙합니다. 항공편과 연계된 연락 버스를 타고 이라부伊良部 대교를 건너 미야코섬에 다다르는 계획입니다. 이렇게 하면 미야코 공항에 착륙하는 것에 비해 최대 3분의 1 비용으로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취항하는 한국의 저가 항공사 진에어의 서울↔미야코 직항선도 실은 인천과 시모지 공항을 연결하는 노선입니다.

하네다 공항에서 시모지 공항으로

스카이마크는 일본의 저가 항공사로 90년대 말부터 저렴한 운임이 인기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항공과 같은 일반 항공사들도 점점 할인폭을 늘리면서 스카이마크의 경영이 악화되었고, 2015년에는 민사재생民事再生, 한국으로 치면 파산회생 신청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위기를 극복하고 일본 국내선 기준 이용객수는 일본항공JAL, 전일본공수ANA에 이어 3위를 점하는 인기 항공사입니다. 물론 저가 항공사인만큼 스카이마크의 국내선에서는 기내 와이파이와 기내식 등의 편의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습니다만, 하네다↔시모지선에는 무료 드링크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제가 탑승한 항공편은 4월 5일자 스카이마크 613편 보잉 737기입니다. 저는 후지산을 조망하기 위해 진행 방향의 우측 창가 자리를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간토 지방과 난세이 제도에 걸친 두터운 비구름 탓에 후지산에 쌓인 만년설을 간신히 확인할 수만 있었습니다. 이륙 후 고도가 안정되자 무료 드링크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커피·사과 주스·녹차 중에 저는 녹차를 주문하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바다가 잠시라도 구름 새로 보일까 기대하며 창밖을 응시했지만, 착륙 직전까지도 하얀 구름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치는 보이지 않았으나 특이한 모양의 구름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01
(1) 간신히 식별된 후지산. (2) 구름과 더 높은 구름 사이의 경계.

 

하필 제가 미야코섬을 방문하는 3박 4일 동안 비가 온다는 예보가 나와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방문하기 바로 이틀 전에 대만에서 규모 7.2의 강진이 일어나, 그 여파로 이 미야코섬에도 해일주의보가 발령되었고 실제로 30cm의 조수 상승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날씨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항공권 환불 수수료는 비와 천재비변을 이겨냈습니다. 시모지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기체가 구름을 뚫고 하강하여 맑고 투명한 하늘빛 산호 바다가 시야에 나타나자 승객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도 잠깐, 거대한 은익銀翼은 곧바로 콘크리트 활주로에 사뿐히 착지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아주 습하고 후텁지근합니다. 섭씨 26도에 습도 83%.

착륙 전 20초 정도 보인 절경

 

하네다 공항 관제소의 요청으로 지연 출발하여 14시 25분에 시모지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내릴 때는 탑승교搭乘橋 없이 계단을 이용합니다. 이국적인 화초로 꾸며진 길을 따라 걸어가면 공항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수하물을 찾고 다른 교통수단으로 환승하게 됩니다. 규모가 작은 공항이지만 화장실은 일본이 자랑하는 워실렛washlet이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15시에 출발하는 에어포트 라이너 버스 티켓을 구입하였습니다. 제가 묵을 숙소에 가까운 기타쇼마에北小前 정류소에 하차하는 경우 비용은 600엔입니다. 파란색 포켓몬 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와 먼저 시모지섬에서 이라부섬으로 짧지만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물빛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짧은 다리 밑에 있에 흐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바닷물입니다. 곧이어 오늘 일정 중 가장 흥미로운 이벤트인 이라부 대교 횡단이 다가옵니다.

 

오키나와 현도 252번. 2015년에 개통된 전장 3.5 km의 거대한 교량으로, 이라부섬과 미야코섬을 연결하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긴 다리입니다. 2015년, 이라부 대교의 개통과 함께 미야코 열도는 육지로 이어진 두 개의 공항을 가지게 되어 관광의 촉진과 유통 비용의 절감을 효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 다리에는 시모지섬에 있는 댐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도관이 심겨 있어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면서도, 또 아름다운 산호 바다가 좌우로 펼쳐져 있어 관광객과 드라이버에게도 대단히 인기 있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라부 대교가 뚫리면서, 원래는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의 훈련 비행장으로만 사용되던 시모지 공항의 경영권을 미쓰비시지쇼三菱地所가 가져가게 되었고, 저가 항공편이 취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모지 공항의 개방은 미야코섬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개선하면서 관광 유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기타쇼마에 정류소에서 하차하고, 16시경에 앞으로 3박을 묵을 MAHHO TERRACE에 체크인하였습니다. 1층에는 카페와 셰어 하우스 형태의 공유 주방과 작업 공간 및 세탁기가 비치되어 있고, 2층에는 방마다 격리된 침대 공간이 여섯 칸 있는 공용 침실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유되는 대신에 1박에 3,000엔 수준(비수기 기준)으로 투숙 비용은 아주 저렴합니다. 투숙객이 거의 없어서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는 미야코섬 프사라平良=히라라 시내 중심지에 위치하여 공항을 포함한 다른 주요 관광지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적 좋기 때문입니다. 면허가 없어 렌터카를 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1) 배차 간격이 어마어마한 주민용 노선 버스 (2) 일본 특유의 살인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택시 (3) 도보가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저는 이 세 가지 교통수단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독일 황제 박애기념비

미야코섬의 진정한 매력은 한없이 투명한 오션블루의 바닷물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관광객은 해수욕, 스노클링, 낚시, 해양 레저를 즐기기 위해 이 섬을 방문합니다. 저 역시 2–3일차에는 바다를 테마로 동선을 계획했는데요, 그럼에도 이 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싶었기에 첫 날은 프사라의 사적들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 숙소 바로 앞에는 역사적인 기념물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현지정 사적 ‘독일 황제 박애기념비’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게 만드는 미야코섬 역사 관광의 출발점으로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독일 황제 박애기념비

 

외딴 섬에 갑자기 독일 황제가 등장하는 배경은 이렇습니다. 1873년 7월, 중국 푸저우福州를 떠나 호주를 향해 항행하던 독일 상선 로베르트손Robertson호는 태풍을 만나 먀군미야구니 앞바다에 좌초난파했습니다. 이를 본 먀군 주민들은 밤새 화톳불을 피워 선원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민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거친 파도에 통나무배를 띄워 선원 여덟 명을 구출해내고 한 달 간 극진하게 상처를 치료하고 보살폈습니다. 섬 관리는 관선을 내어주어 선원들을 무사히 귀국시키는 데 협조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Wilhelm 1세는 먀군 주민들의 박애博愛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군함 치클로프SMS Cyclop호를 파견하여 프사라항이 내려다보이는 땅에 이 대리석 기념비를 건립한 것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독일어와 한문으로 적힌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 탓에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후면의 한문 명문은 비교적 또렷하게 읽힙니다. 한문 명문에 연도가 서력 1873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외모와 언어가 완전히 다른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준 먀군 주민들도 대단하지만, 먼곳까지 대리석을 실은 함선을 보내 기념비를 세운 빌헬름 1세의 행동도 대담합니다. 황제가 직접 보낸 군함도 좌초난파했다면 상당히 난처했을텐데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나봅니다. 이 비석 하나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2일차에 방문할 먀군 지구의 ‘우에노 독일 문화촌’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퍄루미즈 우타키

도로변으로 나오니 박애기념비 반대편에 위치한 퍄루미즈 우타키漲水御嶽를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우타키를 향하는 길에 일본 본토로부터 물자를 수입하고 미야코섬의 물자를 수출하는 창구 중 하나인 ㈜류큐해운의 미야코 지점과, 산호를 가공한 고가의 공예품을 취급하는 가게를 마주쳤습니다.

 

곧이어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리이가 나타납니다. 퍄루미즈는 지명, 우타키는 신들을 모시는 이 지역 특유의 성지를 가리키는데, 미야코섬에는 산이나 숲과 같은 자연물 그 자체를 성지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자연물에 단순히 돌과 향로를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거창한 창조신화의 주인공이 모셔진 미야코 제일의 우타키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허름하기 그지없습니다. 퍄루미즈 우타키는 tskasa+jaː [츠카사야] “사제의 집”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에서 술을 바치고 향을 피웠는지 무언가 그을린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퍄루미즈 우타키

 

미야코섬의 창세 신화를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늘나라의 티다天帝가 야구미신彌久美神으로 하여금 풍수 바른 곳에 섬을 만들라고 명하자, 돌기둥을 꺾어 바다에 던지니 그것이 굳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 미야코섬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티다는 코이츠누古意角와 코이타마姑依玉를 파견하여 비옥한 땅을 일구고 곡식이 자라나는 사람의 세상을 가꾸게 하였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야코섬의 전통 건축을 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기와 사이사이에 회칠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 한국 전통건축의 기와 쌓는 법과 비슷하지 않나요? 한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삐져나와 있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기와의 붉은 빛도 아주 특징적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오키나와 본섬의 슈리성首里城에도 적용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오키나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미야코 신사와 쇼운지

퍄루미즈 우타키 옆길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커다란 돌기둥으로 지어진 또 하나의 도리이鳥居가 나타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미야코 신사가 나옵니다. 미야코 신사와 맞은편에 위치한 쇼운지祥雲寺의 내력은 한국인에게 있어 아주 흥미롭습니다.

미야코 신사

 

미야코에서 오키나와 본섬의 류큐왕부에 제출한 보고서인 《우타키 유래기御嶽由來記》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0년에 프사라 우푸수누푸야쿠大首里大屋子가 류큐, 즉 오키나와 본섬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려던 차에 해난 표류 사고를 당해 고려까지 휩쓸려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조선입니다만, 아무튼 조선에서는 이들을 (왜적로 오인하여) 널판 위에 올려두고 목을 베려고 했으나, 프사라는 피눈물을 흘리고는 슈리성을 향해 절을 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류큐琉球 두 글자를 써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조선에서 5년 간 보호받고, 북경에 보내져 또 3년을 지내다가 조공선을 타고 류큐로 돌아온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8년만에 귀국하자 종교에 의지하게 된 프사라는 초가를 지어 부처를 모셨는데, 나중에 1611년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관리에 의해 기와집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미야코 신사 맞은편의 쇼운지입니다. 다만 지금의 쇼운지는 기와집이 아닙니다. 미야코 신사는 1925년에 창건되어 비교적 최근의 시설이지만 쇼운지와 내력을 공유합니다.

 

조선 《중종실록》에도 연도가 일치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530년에 왜적인 줄 알고 붙잡은 선원 7명이 실은 유구국琉球國 마도亇島 사람이더라는 내용과 고향에 어떻게 송환시킬지 논의하는 내용입니다. 중국을 경유할지 일본을 경유할지, 아니면 유구국에서 사신이 올 때까지 기다릴지 의견이 대립됐으나, 선원들이 일본에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소식을 들은 중종은 측은히 여겨 중국을 경유하여 송환시키도록 명했습니다. 두 문헌기록은 60년의 시기 차이가 있으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반대로 제주도 사람이 미야코섬에 표류한 사건도 있었는데, 3일차에 박물관에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야코 연구의 선구자: 니콜라이 넵스키의 비

 

미야코 신사 바로 앞 골목에 니콜라이 넵스키Николай А. Невский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습니다. 넵스키는 20세기 초, 최초의 미야코어 사전을 편찬하고 기술문법서를 작성한 연구자입니다. 미야코어 외에도 일본의 다양한 언어와 민속학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모국 소련에 귀국한 뒤 일본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일본의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 부부는 국가반역죄라는 명목으로 총살형에 처해집니다. 이 비석은 미야코어를 일찍이 채록하고 연구한 넵스키의 업적과 그의 인생을 기리는 기념물입니다.

프사라항

우타키를 구경하고 나오니 계속해서 흐릴 것 같던 날씨가 요행히 개면서, 화사한 햇살이 구름 틈으로 드러났습니다. 마침 프사라항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옛 류큐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물자는 모두 프사라항을 통해 왕래했습니다. 항공 노선이 개통되면서 프사라항의 중요성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항만에는 여전히 화물·여객선이 오가며 컨테이너도 쌓여 있는 현역 항구입니다.

눈을 부라리는 시사

 

초소처럼 생긴 전망대에 올라가는 계단 한 구석에는 사자의 모양을 본따 만들어진 귀신 쫓는 시사가 놓여 있습니다. 미야코섬을 비롯한 류큐제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석상입니다. 한국의 해태, 일본 본토의 고마이누와 닮았는데 아마 기원이 같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퍄루미즈항이라고 불렸던 이곳. 넓은 잔디밭과 컨테이너, 항만 시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과거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난 섬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추억 깊은 장소일 것입니다. 섬에 남겨진 사람들은 프사라항의 먼 바다를 바라보며 떠나간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근처 자판기에서 일본 본토에서 본 적이 없는 산핀차를 구입해 마셔보았습니다. 꽃 향과 매실 향이 느껴졌는데,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중국의 자스민차에 영향을 받은 음료라고 합니다. 산핀차의 어원은 중국어에서 “자스민차”를 의미하는 香片 [샹폔]이라고 합니다.

나카주니 투유먀의 무덤

프사라항 앞 도로를 주욱 걸어가면 거대한 석총, 미야코섬의 호족이자 도주였던 나카주니仲宗根=나카소네 투유먀豊見親의 돌무덤이 나타납니다. 투유먀는 지역의 수장을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는 호칭입니다. 이 일대에는 일본 중요무형문화재로 일괄 지정된 총 세 개의 무덤이 있는데, 나카주니 투유먀의 무덤은 그중 하나입니다.

나카주니 투유먀의 묘

 

그가 가진 왕년의 권력을 시위하듯, 무덤은 구멍이 잔뜩 뚫린 석회암으로 에워싸여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미야코섬의 바위는 산호의 시체가 굳어서 형성된 석회암인데, 빗물에 탄산 가스가 녹으면서 구멍이 생겨납니다. 이런 구멍 뚫린 돌을 돌무덤을 건설하는 데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미야코섬 무덤 양식의 특징입니다. 무덤 안에는 샘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돌계단이 있습니다. 미야코섬 전통의 먀카 양식과 오키나와 본섬의 횡혈식橫穴式 묘의 절충 양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무덤 양식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카주니 투유먀는 야에야마 정벌의 선봉장이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류큐왕부에 조공을 바칠 것을 거부하여 대립한 야에야마 열도 이시가키섬의 우야키아카하치遠彌計赤蜂=오야케아카하치를 토벌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야에야마 열도는 미야코 열도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옵니다. 훗날 류큐왕부의 가혹한 인두세 제도가 미야코와 야에야마에서 실시되게 되는데, 우야키아카하치가 패배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향으로 역사가 흘렀을지도 모릅니다.

 

나카주니 투유먀에 대한 평가는 남류큐제도의 섬마다, 심지어는 같은 섬이라도 개인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미야코섬에서는 나카주니 투유먀를 영웅으로 추앙하지만, 여행 3일차에 만난 택시 기사님은 정반대의 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사님은 야에야마 열도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류큐왕부와 대립한 우야키아카하치를, 오로지 권력과 명예를 위해 토벌하러 나선 이기적인 인물로 나카주니 투유먀를 평가합니다. 물론 기사님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섬 전체의 사관을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담으로 국내에는 우야키아카하치와 홍길동이 동일 인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홍길동은 가상의 인물이라고는 하되 행적에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진위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정갈하게 세워진 가문 묘

 

투유먀의 무덤 주변에는 지역 주민의 묫자리가 가문마다 가지런히 정비되어 있습니다.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미야코섬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상신을 모시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미야코섬에는 돌을 가공하여 지은 묫자리에 술잔이 얹혀 있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같은 류큐제도에 속하는 아마미 군도의 주민들은 과거 일본 본토의 사쓰마번 사람들과 쉽게 구별하기 위해 한자 한 글자로 된 성씨를 사용하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야코섬의 가문 묘를 본바, 한 글자 성씨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류큐제도 안에서도 이처럼 지역 별로 문화와 관습은 판이합니다.

인두세석

아까 걸어온 도로를 계속 나아가면 구멍이 송송 뚫린 돌이 하나 나타납니다. 미야코섬 사람들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인두세석人頭稅石입니다. 인두세란 사람의 머릿수에 맞춰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이 143cm의 돌보다 키가 커진 미야코섬의 주민은 성별에 따라 갖가지 공물을 류큐왕부에 바쳐야 했습니다.

인두세석

 

미야코섬에 인두세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원래 류큐왕부는 명나라에 조공을 하는 대가로 명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식으로 중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왔습니다. 그러나 1609년, 일본 사쓰마번이 류큐 침공을 통해 류큐왕부를 종속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 명나라와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한 류큐왕부의 재정은 갈수록 궁핍해져 갔습니다. 이에 류큐왕부는 미야코섬과 야에야마섬에 대해 가혹한 인두세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미야코섬의 남성은 좁쌀을, 여성은 삼베를 헌납했습니다. 미야코섬 여성이 짜낸 고급 삼베는 세금의 3분의 2를 점할 정도였는데, 일본 본토에서 사쓰마 조후薩摩上布라고 불리는 고급 직물로 통하여 오사카에서 고가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기근에 허덕이는 시기에도 체납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강제노동에 가까웠습니다. 또 세금을 체납한 주민들에게는 5인조라는 연대 책임을 물어, 미야코섬 주민들은 인두세 탓에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인두세는 1879년에 류큐왕국이 일본에 완전히 편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유지되다가, 미야코 청년이 일본제국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노력으로 190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폐지됩니다. 미야코섬의 여성들이 생산하던 고급 삼베인 미야코 조후宮古上布는 지금도 유명한 미야코섬의 특산품입니다.

은캬두라 어항

인두세석 도로 맞은편에는 은캬두라荷川取=니카도리 어항이 있습니다. 해일 발생시 대피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대만에서 일어난 강진의 여파로 3m의 해일 경보가 발령되자 미야코섬 주민들이 대피했다는 뉴스 보도가 불과 이틀 전의 일입니다. 실제로 관측된 조수 상승은 30cm였기에 해일 주의보로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은캬두라 어항에서 바라본 광활한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잔잔합니다. 그러나 바다 건너 대만에서는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피재지의 주민들이 하루 빨리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염원하며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대만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해일 피난소 안내 표지판

한국 이자카야 ‘만남’

제법 걸었더니 노을이 지고 허기가 졌습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시내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데 상당히 걸어야 했습니다. 미야코섬의 향토 요리인 미야코 소바를 맛보기 위해 여러 식당을 전전했으나, 문을 열지 않았거나 이미 예약이 꽉 차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눈에 봐도 관광객을 겨냥한 식당들이 몰려 있는 시장 거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간판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들어간 가게가 우연히도 한국 이자카야 만남이었습니다. 점내에는 미야코섬에서 매년 개최되는 철인 3종 경기 대회인 ‘스트롱맨’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들의 사인과 방명록이 전시되어 있었고, 판매하는 메뉴도 한국 음식이 메인이었습니다. 저는 미야코 소바와 오리온 생맥주를 주문하였습니다.

철인 3종 경기 한국인 참가자가 남기고 간 메시지

 

오리온 맥주는 오키나와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류큐제도를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입니다. 이곳 미야코섬에서도 오리온 맥주가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미야코어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라이터 시모지 이사무도 오리온 맥주의 CM에 출연한 바 있습니다.

 

총거리 200km 이상을 완주해야 하는 ‘스트롱맨’은 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대회인듯 합니다. 마침 제가 방문한 바로 다음주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어, 거리에는 참가 선수들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습니다. 철인 3종 경기 선수들은 미야코섬을 일찍이 잘 알고 여러 차례 방문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미야코 소바

 

미야코 소바의 맛은 한국의 길거리 술집에서 파는 어묵탕 맛과 같은 익숙한 맛이었습니다. 본격적 요리점이 아니라서 술집 안주 같은 맛이 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독으로 지친 몸을 모즈쿠스와 소바, 오리온 생맥주를 마시며 풀고 숙소에 들어가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1일차 마무리

비석이라든지 돌무덤이라든지 인두세석이라든지 온통 돌과 역사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미야코섬에 방문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시간을 들여서 기껏 찾아왔는데 이곳 사람들이 어떤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역사를 걸어왔는지 아무런 배움도 없이 떠나기에는 짐짓 아쉬운 것입니다. 여행 2일차부터는 미야코섬의 제맛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바다의 비중을 차츰 늘려가게 됩니다만, 여전히 이곳 섬과 사람들의 역사·문화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투명한 바닷물이 미야코섬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우선 미야코섬에서 가장 저렴한 대중교통인 노선 버스를 타고 남쪽의 먀군 지구로 이동합니다. 독일 상선 좌초난파 사고와 독일의 중세 문화, 일본과 독일의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우에노 독일 문화촌’을 관람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하쿠아이항博愛港에서 반잠수식 수중 관광선을 타고 미야코섬의 아름다운 바닷속 생태계를 관찰합니다. 아름다운 남쪽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임갸 마린 가든’에서 비취빛 산호 바다의 황홀한 광경을 내려다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아픈 역사인 종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아리랑의 비’를 찾아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비극의 흔적을 마주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