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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평화누리특별자치도는 왜 기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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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 ‘경기북부특별자치도 새 이름 대국민 보고회’에서 공개된 가칭假稱 경기북부특별자치도의 새 이름은 ‘평화누리특별자치도’입니다. 처음 이 지명을 전해듣고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니 ‘저게 공식 명칭이에요?’와 같은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평화를 지향하여 명명된 지명은 적지 않습니다. 중국 난징의 옛 지명인 건강建康과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 등은 노골적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누리특별자치도는 제 인상으로는 평양지하철도 천리마선과 혁신선의 역명을 보는듯 합니다. 일반명사의 조합이며 이념적인 성격을 갖는 평화누리특별자치도는 작위적이며 경기북도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평화누리’는 특정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지나치게 일반적이며 독점적인 의미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경기도 북부 지역의 역사를 반영한 것도, 경기도 북부 지역 주민들의 사회적 합의를 반영한 결과물도 아닙니다.

나무위키 평양지하철도 문서에서 발췌

 

또한 ‘누리’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리꾼’과 ‘누리집’과 같이 ‘누리’의 본의로부터 크게 괴리된 의미가 부여되거나, 공적인 프로젝트의 명명 시에 남용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누리호’ ‘다누리’ ‘공공누리’ ‘아람누리’ ‘새누리’ 등 열거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과도하게 남용된 ‘누리’는 특징적이어야 하는 도급 행정구역의 지명으로서는 부적절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모전은 속되게 말하면 ‘운빨 가챠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대량의 아이디어를 수집할 수 있지만, 전문가 한 명이 내놓은 적은 수의 아이디어보다 한없이 수준이 낮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양보다 질’ 주의자로서, 도급 행정구역의 지명을 정하는 중요한 현안은 지명 관련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누리특별자치도 외에 수상한 후보들도 저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지명의 ‘한문맥’이 무시된 후보

장려상을 수상한 ‘경의도’라는 지명은 경기 북부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지명은 “경의선과 가까워 대표성을 지닐 수 있고 의정부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의선의 의주義州는 북한 평안북도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것이 도대체 경기북도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경의선은 서울과 의주를 잇는, 원래대로는 휴전선을 넘어 한반도와 중국 만주 지역을 잇는 기차 노선입니다. 휴전선을 넘는다는 의미에서 이념적인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의정부議政府의 ‘의’는 의주의 ‘의’와 한자가 다릅니다. 아무리 한국 사회가 한자를 이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통적으로 지명에는 한자가 붙기 마련인데, 자국의 전통을 지나치게 경시한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반크VANK와 같은 민간단체가 이순신의 이름의 의미가 “순임금의 신하”인 것이 부끄러워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한글화하자고 주장하는 등의 현 세태는, 마치 한자 사용이 더 이상 한국의 전통 문화가 아니라는 듯한 최근의 국민 인식을 반영하는듯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조선의 주권을 지킨 명장의 이름이 부끄럽다니?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자가 부끄럽다는 것은 중화 버금으로 한자 문화를 수용하여 발전시켜온 한국의 어문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려상을 수상한 ‘경현도’ 역시 한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지명임이 틀림없습니다. 현은 행정구역 단위입니다. 한국 전통 지명에 반영된 한문맥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막무가내로 지어진 이러한 지명 후보들은 제 기준으로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이념적 양극화를 강화하는 지명

온유도와 이음도가 수상작인 것은 이상합니다. 온유도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지역을 의미”한다고 하며, 이음도는 “남과 북을 연결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온유도는 짐작건대 K-POP 남성 아이돌 그룹인 SHINee의 팬이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데 수상한 듯하고, 이음도는 앞서 비판한 경의도와 마찬가지로 이념적인 성격을 갖는 후보입니다. ‘KTX-이음’에서 사용된 이음은 제가 보기에 적절합니다. 그러나 과연 경기북도의 명칭으로 사용되기에 적절할까요? 경기북도는 경기도의 이북 미수복 지역을 포함하게 될텐데, 휴전선으로 격리되어 있어 전혀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어지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에서 제안된 이름이겠지만, 왜 그러한 희망을 지명에 반영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누리’와 마찬가지로 전혀 고유명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 요소를 지명에 적용하는 사고방식은, 작명자의 지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지명은 변별적이며 독점적이어야 하고, 상징성이 있어야 하는데, ‘누리’와 ‘이음’과 같이 브랜드명에서 남용된 2음절 고유어를 지명에 대하여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우수상 수상작인 한백도는 “한라산과 백두산을 아우르는 한반도의 중심을 의미”한다는데, 이 역시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이념적인 지명이며, 경기북도 주민 중에 남북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흡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도 명백하지만 구태여 부가설명하자면, 남북통일이 나쁘다는 의미로 이념적 지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요즘 20대 중에서는 드물게 남북통일을 필요한 국가적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지명에 특정 이념을 강요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경의도의 의주와 마찬가지로 경기북도에는 백두산도 한라산도 위치하지 않으므로, 적절성이 결여되어 있음은 명백합니다.

마음에 드는 후보

수상작들 전체가 나사 빠진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모두 장려상을 수상한 기전畿甸도, 양정陽政도, 임한臨漢도는 전통적인 지명 명명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그럴듯합니다. 고지명을 되살리기만 한 기전도의 경우 경기북도에 대해 한정적이지 않으므로 저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나 양정도와 임한도는 마음에 듭니다.

 

양정도는 도급 행정구역 내의 주요 도시 두 개의 일부 요소를 따와서 합친 전통적인 작명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강원도가 강릉과 원주, 충청도과 충주와 청주,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것이듯이, 양정도는 고양과 의정부에서 따온 것입니다. 물론 경기북도의 으뜸가는 주요 도시가 무엇인지는 주민마다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 규모와 인구 등의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조율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임한도는 새로운 창작 지명이지만 매우 흡족스러운 후보입니다. 왜냐하면, 한문맥의 관점에서 한강漢江을 내려다보는[臨] 경기북도의 지리적 조건을 잘 반영한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경기북도의 새 지명 수상작 중에 실적용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후보는 임한도라고 봅니다. 대안으로 나온 기북畿北도 역시 적절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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