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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선비·몽골어족

거란어의 “쌍두사 문제”와 고대 한국어 어휘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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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저명한 거란어 연구자인 김태경金泰京 소장 著 《거란소자 사전》(2019)에는 동물 “뱀”과 간지의 “巳”(이하 편의상 “뱀”으로 대표함)을 의미하는 거란어 단어의 거란소자 표기가 𘰕𘭞𘯶(p. 236)와 𘰗𘭞𘯶(p. 242)의 두 가지 형식으로 실려 있습니다. 두 표기는 오직 첫 번째 자소만 달라 혼동되기 쉬워보입니다. 이들이 동일 단어의 이표기인지, 아니면 한 쪽이 다른 쪽의 오독(혹은 오사)인지 판단하기 일견 곤란해보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제가 멋대로 명명한 “쌍두사 문제”에 대한 제 견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관견管見에 따르면, 거란어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은 𘰕𘭞𘯶 ‹iň-or-oo›를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𘰗𘭞𘯶 ‹ül-or-oo›를 올바른 표기로 보는 것입니다. 일례로, 거란어학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우잉저 외 《거란소자 재연구》(2019)의 용례 색인에는 오로지 𘰗𘭞𘯶 ‹ül-or-oo›만이 실려 있습니다. 같은 책의 권2에 실린 전자화 텍스트에서도 𘰗𘭞𘯶 ‹ül-or-oo›만이 확인됩니다.

 

우잉저 외(2019) 권2의 전자화 텍스트 일부

 

저명한 연구서인 지스(2012)에서도 𘰕𘭞𘯶 ‹iň-or-oo›를 𘰗𘭞𘯶 ‹ül-or-oo›로 교감하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기간旣刊 연구에서 𘰗𘭞𘯶 ‹ül-or-oo›만을 올바른 표기로 간주하는 배경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선 거란소자의 표기 원리 및 특징에 대해서 개설하겠습니다.

거란어는 거란대자와 거란소자라고 불리는 두 가지 문자 체계로 표기되는데, 이 중 거란소자의 표기 원리는 독특합니다. 하나의 단순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하나 혹은 복수의 ‘자소’로 구성됩니다(오타케 마사미 2024:90). 즉, 거란소자는 한글과 비슷하게 자소(들)을 조합하여 한 글자를 구성합니다만, 여기서는 디지털 환경의 한계상 선형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글과 달리, 거란소자 자소의 약 30% 정도가 ‘모음+자소’를 나타내는 VC형 음절 자소라는 점입니다(V = 모음, C = 자음). 또한, 한글과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최다 여덟 자소로 구성되는 글자가 문증됩니다. 그리고 한글과 비교했을 때 가장 다른 특징은, 자소의 시각적 형태와 음가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점입니다.

다케우치 야스노리(2024:9)
한글과 달리 비슷하게 생긴 자소 간에 발음의 유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𘰕 ‹iň›과 𘰗 ‹ül›은 서로 아주 닮았습니다. 실은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추정 음가는 오타케 마사미(2020)에 의한 것으로, 우잉저 외(2017)는 전자를 ‹n›, 후자를 ‹m›으로 추정합니다. 𘰗의 음가를 ‹ül›로 추정하는 것은 오타케 선생 이래 정착한 일본 학계의 최신 관점으로, 중국학계의 전통적인 추정 음가는 ‹m› 혹은 ‹mu›나 ‹mo›입니다. 그리고 𘰗의 음가가 양순 비음 /m/을 포함한다고 보는 근거가 바로 거란어의 “뱀”입니다.

거란어학의 초기 명저인 칭걸테 외 《거란소자 연구》(1985)에서는 𘰗𘭞𘯶 “뱀” 중에 𘭞를 ‹g›(오타케의 ‹or›), 𘯶를 ‹o›(오타케의 ‹oo›)로 읽습니다. 그러나 남은 𘰗의 음가는 해명되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거기서, 고전 몽골어에서 “뱀”을 의미하는 ᠮᠣᠭᠠᠢ moɣai를 근거로, 𘰗의 음가를 ‹m› 혹은 ‹mo›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𘭞가 ‹or›와 같이 읽히기 때문에 더 이상 몽골제어와의 대응은 성립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학계의 대세는 𘰗의 음가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중국 학계에서는 왜 𘰗𘭞𘯶 ‹ül-or-oo›만을 올바른 표기로 인정하는 것일까요? 제가 거란소자 자료의 탁본을 확인해본 결과, 우잉저 외(2017)가 “뱀”을 의미하는 거란어와 몽골어 단어의 대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개찬改竄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워졌습니다. 보존 상태가 좋은 거란소자 묘지명 탁본에서는, 명백하게 𘰗𘭞𘯶 ‹ül-or-oo›가 아닌 𘰕𘭞𘯶 ‹iň-or-oo›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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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耶律高十令公墓誌》 22:19. 제5획이 선명하게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굽었다. (2) 《耶律迪烈太保墓誌銘》 22:9. 스캔 품질이 좋지 않지만, 직접 본바 𘰕 ‹iň›로 식별된다. (3) 《道宗皇帝哀冊》 4:8. 𘰗 ‹ül›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휘어진 세로 획은 𘰕 ‹iň›을 시사한다. (4) 《耶律抄只郞君墓誌銘》 15:16. 또렷하게 𘰕 ‹iň›으로 나타난다. (5) 《蕭胡睹菫太師墓誌銘》 9:12. 선명하게 𘰕 ‹iň›으로 나타난다. (6) 《蕭査剌相公墓誌銘》 4:13. 휘어진 세로 획은 𘰕 ‹iň›을 시사한다.

 

조금 애매한 《도종황제 애책》을 제외하면 모두 𘰕 ‹iň›으로 보입니다. 지스(2012)가 이들을 구태여 𘰗 ‹ül›로 교감한 것은, 아마도 고전 몽골어 moɣai 및 몽골제어 간의 대응 관계를 의식한 결과일 것입니다.

실은 거란어 “뱀”이 𘰕𘭞𘯶 ňoroo /ɲɔrɔː/여야만 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거란대자 자료가 나올 차례입니다. 거란어는 앞서 언급했듯이 두 종류의 문자 체계로 표기됩니다만, 그 중 상대적으로 표의성이 높으며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것을 ‘거란대자’, 상대적으로 표음성이 높으며 조합적으로 나열되는 것을 ‘거란소자’라고 부릅니다. 거란대자 자료에서 “뱀”은 와 의 두 가지 형식으로 표기됩니다. 이 중 전자에 주목해주십시오.

 

“뱀”을 의미하는 거란어 단어의 거란대자 표기의 한 형식.

 

거란소자 자료와 거란대자 자료가 표현하는 문장은 동일 언어로 여겨집니다. 달리 말하면, 거란소자 표기와 거란대자 표기는 서로 대응합니다. 거란대자 와 거란소자 𘯶 ‹oo›가 대응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문자해독 원리의 조응 가설correspondence hypothesis과 선형성의 가설linearity hypothesis에 의거(오타케 마사미 2013), 거란대자 은 거란소자의 나머지 부분에 대응해야만 합니다.

우잉저 외(2017)의 자소 목록에 나타나는 소자와 대자 간의 대응 관계.

 

따라서, 거란대자 에 대응하는 거란소자 표기는 𘰕𘭞 ‹iň-or› /ɲɔr/ 혹은 𘰗𘭞 ‹ül-or› /ylɔr/이 되어야 합니다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거란대자 은 단독으로는 표의자表意字로서 “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란소자 자료에서 “날”을 뜻하는 단어는 𘲺 ňer /ɲɛr/입니다. 물론 𘲺 ňer은 𘰗𘭞 ‹ül-or›보다는 𘰕𘭞 ‹iň-or› /ɲɔr/에 가깝지만, 모음에 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전거란어pre-Khitan에서 발생한 ‘초두 음절의 모음 경구개화’ 현상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초두 자음이 전설前舌 자음이면서 동시에 모음 *o가 후속하는 조건에서, 초두 모음이 순음화한 소리 변화가 알려져 있습니다(오타케 마사미 2020:150). 즉, 거란어의 “뱀”은 *ňeroo > ňoroo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탁본에 나타나는 자형, 소자와 대자 간의 대응, 역사적인 소리 변화 등 다양한 정보에 비추어보면, 거란어의 “뱀”은 𘰗𘭞𘯶 ×üloroo가 아니라 𘰕𘭞𘯶 ňoroo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선비·몽골어파로 분류되는 거란어의 𘰕𘭞𘯶 ňoroo “뱀”은, 계통 관계가 입증된 몽골제어에서 동원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𘰕𘭞𘯶 ňoroo가 고대 한국어로부터의 차용어라고 상정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향문천 2024:379–381). 또한, 거란대자의 원형이 서기 920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도 주장하고자 합니다.

몽골제어에는 𘰕𘭞𘯶 ňoroo와 동원어라고 여겨지는 어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문헌에는 미르 miluᴸᴴ “용”이라는 단어가 문증됩니다. 초두 자음의 불일치는 설득력을 저하시킵니다만, 일본 국립국어연구소 공동연구원 윤희수 씨는 미리내 mili-nay “은하”의 현대 방언형 이리내 ili-nay를 제시합니다. 중세 한국어에서 전설 고모음에 선행하는 n 음은 근대 시기에 탈락했습니다. 즉, “이리내”의 존재는 중세 한국어 미르 miluᴸᴴ의 가설적인 방언형 니르 *nilu의 존재를 시사합니다.

더욱이, 명백하게 한국어로부터의 차용어인 거란어 𘬥𘲀𘭲𘮒 šʊlʊğʊr < ?*šilagʊr “고려”는 초두 자음이 경구개음으로 나타납니다만, 이는 어느 시점의 한국어에서 전설 모음에 선행하는 자음이 경구개화하는 현상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ňeroo는 바로 이와 같은 음성 실현을 반영합니다.

덤으로, 전거란어에서 발생한 모음의 역행동화가 언제 발생했는지는 불명입니다만, 거란대자 표기  *ňeroo와 거란소자 표기 𘰕𘭞𘯶 ňoroo의 비교로부터 그 시점을 거란대자 창제 이후, 거란소자 창제 이전으로 가정한다면 비현실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정사 《요사》에 따르면 거란대자는 신책神冊 5년(92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사》에 따르면 거란소자는 천찬天贊 3년(924년)에 완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고작 4년 사이에 대규모 모음 동화가 발생하여, 그 변화가 거란소자에만 반영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란대자의 원형을 상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 *ňeroo를 오래된 철자 관습으로 취급하는 편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선비계 민족은 일찍이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용지묘지慕容智墓誌》에 새겨진 토욕혼 문자도 유명합니다. 거란대자는 아마도 서기 920년보다 전에 이미 그 원형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용지묘지》 탁본

 

거란대자 자료에서 나타나는 “뱀”의 나머지 형식인 은 철자와 발음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고자 고안된 개신 표기일 것입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 김태경(2019)『거란소자 사전』조선뉴스프레스
  • 大竹昌巳(2013)「文字の体系と文字解読の原理」『KOTONOHA』131: 1–11
  • 大竹昌巳(2020)『契丹語の歴史言語学的研究』 京都大学博士論文
  • 大竹昌巳(2024)「契丹語の音調」『言語研究』165: 85–110
  • 武内康則(2024)『契丹小字で表記された漢語音と契丹語の音韻』神戸市外国語大学外国学研究所
  • 吳英喆외(2017)『契丹小字再硏究』內蒙古大學
  • 卽實(2012)『謎田耕耘:契丹小字解讀續』遼寧民族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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