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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선비·몽골어족

거란어로 본 토욕혼어, 토욕혼어로 본 거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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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어吐谷渾語는 자료가 희소하여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언어입니다. 지금까지 전하는 몇 안 되는 토욕혼어 자료는 토욕혼어 화자에 의해 생산된 자료와, 그 주변 지역의 다른 언어 화자가 생산한 자료의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저번 글에서 시독試讀해본  《모용지慕容智 묘지》는 토욕혼 문자라고 명명된 생경한 문자가 석각되어 있는데, 토욕혼어 화자에 의해 생산된 현전하는 유일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토욕혼 왕국은 남쪽으로는 토번, 동쪽으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중국, 소위 ‘탁발拓跋 국가’가 자리했습니다. 북쪽의 초원 오아시스 지대에는 시대에 따라 유연柔然 혹은 돌궐과 접경했습니다. 이 중 토번과 중국은 토욕혼의 언어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티베트 문자 자료인 돈황 사본 《PT 1283》에는 거란의 언어가 토욕혼의 언어와 거의 일치한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몇몇 한적漢籍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토욕혼어 어휘는 실제로 거란어와 형태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최근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전한 거란어학의 힘을 빌려 토욕혼어의 해상도를 높여보는 초보적인 시도가 이번 기사의 취지입니다.

PT 1283의 마지막 엽

 

토욕혼은 모용선비로부터 분리되어 서진西進한 집단이므로 거란어와 마찬가지로 선비어의 후예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용선비의 언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의 동양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되어 동양 사학자와 언어학자의 주목을 받았으나, 자료의 부재는 연구의 진척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시라토리의 연구는 고전 몽골어와의 비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등 선구적인 접근법을 제시하였으나 시대의 한계 탓에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는 몇몇 어휘와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거란어를 활용한 제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거란어는 고전 몽골어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특징적인 음운론적 개신, 대표적으로 어중 자음의 약화, 모음 역행동화, 그리고 어말 모음의 탈락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신이 토욕혼어에도 나타나는지 검토하며 진행하겠습니다.

지배자 칭호 ‘가한’

정사 《송서宋書》 권96 선비·토욕혼전에 따르면, 토욕혼어의 可寒 khaX han은 “관가官家”의 의미라고 합니다. 유라시아를 통일했던 몽골제국의 영향으로 현대에는 ‘칸’으로 통하는 호칭과 동원어입니다. 거란소자 자료에도 거란어 𘭅𘭂𘬐 χağ-an이 문증되어 나타나는데, 일부 거란어 연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종종 놓치고 있는 점은, 이 단어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단어에 속격 혹은 대격 표지가 첨가된 형태라는 것입니다. 거란어를 기준으로 보면, “지배자”를 뜻하는 어근은 χağ-이며 단독으로 나타나는 표현형은 χaa입니다. ‘칸’ 계통의 단어의 궁극적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선비어파의 맥락에서 이러한 곡용 양식이 토욕혼어에도 공유되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可寒 khaX han은 토욕혼어의 어떠한 곡용 형태를 취한 음역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구태여, 거란어로 치면 속격·대격 격어미를 포함한 형태가 대표로 기록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비슷하게 모종의 잠정적인 토욕혼어 접사 *-Vn이 첨가된 것처럼 보이는 吐谷渾 thuX yowk hwon “토욕혼(인명에서 유래)”과 可足渾 khaX tsjowk hwon “가족혼(성씨)”, 奕洛韓 yek lak han “혁락한(인명)” 등의 음역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可寒 khaX han과 마찬가지로 *-Vn 음절이 ‘첨가되었을지 모르는’ 형식이 빈출하는 배경에 대해 저는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이들이 실제로 곡용 형태를 음역한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이들 인명 음역 표기에서 마지막 음절의 성모聲母가 중고음 기준 匣母 h- 또는 이와 닮은 아후음牙喉音 성모를 취합니다. 또한 그 앞 음절에는 입성 운미入聲韻尾 -k가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곡용하지 않을 때는 음절말 자음이 중국어의 입성 운미 -k와 같은 청각 인상을 주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붙은 곡용 형태에서는 마찰음적인 청각 인상을 주는, 예컨대 *-γ 같은 어간말 자음을 설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可寒 khaX han의 음역에 사용된 뒤에서 두 번째penultimate 음절의 유형이 인명의 사례와는 조금 다르지만, 곡용 형태를 대표로 취하여 음역한 평행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거란인의 작명 관습(요시모토·진 2007)을 토욕혼인 역시 마찬가지로 따랐다면, 이들 인명은 실제로는 남성의 字일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거란인들은 아들의 字는 아비의 名을 취하여 접사 -Vň /ɲ/을 첨가합니다. 거란어 고유명의 한자 대음 자료에서는  /ɲ/를 잉여적인 음절을 추가하면서라도 ‘寧’과 같은 글자를 통해 원어 발음에 근접시키려는 음역 방식이 종종 사용되었으나 반드시 지켜지는 관습은 아니었으며, 중국어의 -n 운미 음절로 대음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可寒 khaX han과 같이 곡용 형태를 대표로 취한 음역의 예시는 큰 폭으로 줄어듭니다.

 

저는 거란어 자료를 중시하여 “지배자”를 의미하는 토욕혼어 *qag(a) 혹은 *qaʁ(a)를 재구하고, 《송서》에 나오는 음역 표기 可寒 khaX han은 모종의 곡용 형태 *qagan 혹은 *qaʁan을 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거란어에서 “지배자”를 의미하는 단어의 어근은 χağ-인데, 거란어의 ğ는 전거란어pre-Khitan의 자음추이와 *g < (*k)와 *γ (< *χ)의 추가적인 약화로 형성된 이차적인 음소입니다. 후자의 경우, *ʁ (< *q)와 같은 변화가 선행한 다음, 거란어 측의 개신으로 χγ 같은 연구개 마찰음으로 추이했다고 간주합니다. 후술할 “크다”와 “형”의 뜻을 가지는 토욕혼어 어휘를 대응되는 거란어 형태와 비교하며 검토하면, *qaʁ(a)가 더욱 개연성 높은 재구가 될 것입니다.

“크다”와 “형”으로 보는 거란어의 모음 전설화 조건

정사 《진서晉書》 권97 서융·토욕혼전에 따르면, 토욕혼어의 阿干 'a kan은 “형”의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음역 표기 역시 저는 격어미 *-Vn이 첨가된 형태로 간주합니다. 거란어에서는 “형제”를 𘱛 𘮉 ää dəw라고 하는데, 이 중 앞에 나오는 𘱛가 “형”, 정확히는 “동성 남성 손위 형제를 부르는 호칭”에 해당합니다. 거란어의 형제 호칭은 손위와 손아래, 남성과 여성, 이성과 동성에 따라 복잡하게 구분되는 체계로 구성되는데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류펑주劉鳳翥를 중심으로 하는 북경대학파는 ää dəw의 뜻이 “형제”뿐만 아니라 “횡장橫帳”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하는데(劉鳳翥 2022:271-293), 거란문자 위조품 문제(저는 𘱛 𘮉만으로는 일부 거란문자 자료가 위조품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와도 엮여서 논란이 있는 주제입니다.

 

돈황 사본 《IOL Tib J 1368》에는 토욕혼의 왕을 가리키는 칭호로 མ་ག་ཐོ་གོན་ཁ་གན་ maga thogon khagan이 티베트 문자로 전사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티베트 문자로 전사된 མ་ག་ maga는 “크다”, ཐོ་གོན་ thogon은 “토욕혼”, ཁ་གན་ khagan은 “지배자”로 명쾌하게 해석됩니다. 최근 거란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거란문자의 추정 음가가 놀라울 정도로 정밀해졌습니다. 그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토욕혼어 어휘의 전사 표기 མ་ག་ maga에 대응되는 거란어 동원어로 저는 𘲇 mää “크다.F”를 제시합니다. 거란소자 자소 𘲇는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mos›와 같이 재구되어 왔습니다. 근거는 고전 몽골어와 몽골 제어에서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거란어 ‘쌍두사 문제’ 기사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의미 상의 관련성 외에는 어떠한 증거도 결여된 상태에서 몽골어 데이터에만 의존하여 거란소자의 음가를 추정한 과거의 연구는 재구된 결과의 정확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타케 마사미(2016:65)가 운문 자료를 근거로 추정한 ‹mää› 음가에 맞춰 글을 전개하겠습니다.

 

거란어의 𘱛 ää “형”은 곡용할 때 기저형 𘳍 äğ-가 드러납니다. 공교롭게도 거란어의 𘲇 mää “크다.F” 역시 접사가 후속하는 형식에서는 어간이 𘲇𘳍 mäğ-로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알고 토욕혼어와 거란어에서 “형”과 “크다”를 의미하는 단어를 비교하면 어떠한 규칙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전거란어에서 *g 혹은 *ğ가 짊어지고 있던 선행 모음의 전설화를 수반하는 음성적 효과가, 그것의 탈락으로 인하여 음운화되어 이차적인 전설 모음 음소들을 생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거란어에서 i를 제외한 나머지 전설성의 모음 음소는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거란어에서 발생한 ‘어중 자음의 약화’ 개신이 적어도 한자 음역 표기에 반영된 토욕혼어의 시대 및 공간적 변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앞서 재구한 토욕혼어 *qaʁ(a) “지배자”에 대응되는 거란어 𘭅 χaa는 전설 모음을 포함하지 않는데, 이는 거란어의 ğ 음소의 두 가지 기원의 차이에 따라 음운변화가 분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달리 말하면, 전거란어 *γ에서 기원하는 ğ를 포함하는 거란어 형태는 ğ 탈락 여부에 관계 없이 모음의 전설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설화를 유발하는 음소가 *γ인지 *g인지는 이 비교 데이터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으나, 유형론적 관점에서 *γ 혹은 잠정적인 거란어 측의 연구개화 개신 이전의 *ʁ와 같은 구개수음이 전설화를 유발할 동기가 그다지 없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이 새로운 발견은 베일에 싸인 토욕혼어의 음운 체계와 음운사를 조금 더 선명히 해줄 뿐 아니라, 거란어의 형태·음운사에 시사하는 바도 실로 거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어 형용사의 일부 여성 단수형이 모음의 전설화라는 형태 조작에 의해 형성된 것은 오타케(2016)의 연구를 통해 이미 발견되었으나, 그 조건의 거란어 외적인 증거는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건은 거란어 형용사의 여성 단수형의 모음 전설화 형태 조작을 빈틈없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전설 모음에 대해 *g의 탈락을 가정하기에는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자음의 약화가 어말 환경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우므로, 거란어에 나타나는 어말 모음의 일괄 탈락은 선비조어 단계에서 일어난 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토욕혼어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상, 토욕혼어와의 비교를 통해 전거란어 *χaγ(a) ( < **qaʁa), *mag(a), *ag(a) > 거란어 χaa, mää, ää라는 변화 과정과 조건을 밝혔습니다.

토욕혼어에도 문법적 성이 있었나

거란어에는 명사류 품사에 문법적 성이 매겨져 있습니다. 거란어의 품사는 명사류, 동사류, 불변화사류로 나눌 수 있는데(大竹2020:165), 명사와 형용사는 명사류에 속하며 성·수·격에 따른 형태 변화를 보입니다. 중세 몽골어에도 근근하지만 문법적 성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선비몽골조어 단계에서 문법적 성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만, 검증을 위해서는 몽골어파와 선비어파 간의 비교가 필수적입니다. 거란어에서는 명사류 단어와 단어에 부여된 성으로부터 형태론적·의미론적 관련성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어파 간에 규칙적인 성의 대응이 인정된다면 조어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토욕혼어에 이러한 문법적 성의 기능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거란어와 ‘거의 일치하는’ 언어라는 기술을 신뢰해보겠습니다.

 

막호발莫護跋이라는 인물은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선비의 시조로, 중국 삼국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삼국시대는 《송서》나 《진서》 같은 앞서 인용한 중국 자료에 비해 이른 시기이지만, 해당 음역 표기는 당대唐代에 편찬된 《통전通典》에 처음 나오므로, 막호발이 살았던 당시의 선비어의 일종과 중국어를 반영한 음역 표기가 아니라고 간주하겠습니다.

 

막호발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고찰한 선행연구는 강준영(2021:105)에 자세하나,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고유명사인만큼 설득력 있는 주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莫護 mak huH를 “크다”를 의미하는 형용사의 남성 단수형으로 가정하겠습니다. 시대 차가 크지만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위에서 사용한 토욕혼어 재구 형식을 취하여 *mago를 상정합니다. 거란어에서  𘲇 mää “크다.F에 대응되는 남성 단수형은 𘲜𘯶 moo “크다.M”입니다. 거란어의 모음은 역행 원순화의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막호발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서가 그다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입니다. 토욕혼어에도 문법적 성이 존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앞으로 찾아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 강준영(2021)〈모용선비(慕容鮮卑) 언어 연구〉《東洋學》85:99-121
  • 劉鳳翥 외(2022)《契丹文字辨僞錄》北京燕山出版社
  • 吉本智慧子·金適(2007)〈契丹古俗「妻連夫名」與「子連父名」―再論契丹人「字」的詞性〉《立命館文學》602:19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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