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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트랜스히말라야어족

요대 중국어는 근고를 재정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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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언어의 시대 구분은 언어학자가 판단하기에 중요하거나 특징적인 언어의 유형적 개신에 기반해서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 문헌이 해당 언어의 공시태를 반드시 균등하고 풍부하게 반영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특정 공시태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몇몇 문헌 자료를 기준으로 편향적으로 정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어 음운사의 시대 구분을 보면, 나라奈良 시대의 《만엽집萬葉集》을 기준으로 ‘고대 일본어’를 정립하고,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키리시탄 문헌을 기준으로 ‘중세 일본어’를 정립합니다(하시모토 신키치 1927). 한국어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음운 체계의 총체를 제공하는 자료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향가, 구결, 이두 자료를 기준으로 ‘고대 한국어’를 정립하고, 15세기 한글 창제를 기준으로 ‘중세 한국어’를 정립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육법언陸法言의 《절운切韻》을 바탕으로 중고 중국어中古漢語를 정의합니다. 《절운》 이후 시대가 흐르며 중국어의 음운 체계가 변화했음에도 당대唐代에 나온 《당운唐韻》과 송대宋代에 나온 《광운廣韻》 등은 오로지 《절운》 체계에 기반하여 현실음과는 괴리된 이상적인 운서를 추구하며 증보되었습니다. 그 뒤에 비로소 현실음을 총체적으로 재반영한 운서가 원대元代의 《중원음운中原音韻》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기준으로 근고 중국어近古漢語를 정의합니다. 《중원음운》은 현대 관화官話 제방언 체계의 기초라고 여겨지므로, 《중원음운》가 반영한 근고 중국어를 ‘조기 관화’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관화’적인 체계의 출발점은 정말로 원대일까요?

 

2010년대 이래 거란어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거란문자 자료에 반영된 요대遼代 중국어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척되었습니다. 거란소자로 표기된 중국어 음절에는 이미 입성入聲의 사성斜聲 합류, 전탁全濁 성모의 청음淸音화, 차탁次濁 성모의 공명음화 등 전형적인 근고 중국어 체계의 특징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중고 중국어와 근고 중국어를 구분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성조의 추이와 분합分合입니다. 요대 중국어의 성조 체계는 최근 거란어학의 발전과 함께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요대 중국어의 성조 체계

거란소자 자료의 일부 중국어 음절에서 ‘잉여 표기’라고 불리는 특수한 표기가 관찰됩니다. 거란소자 자료에 나타나는 잉여 표기는 선중웨이沈鍾偉(2012)의 선구적인 연구에서 중국어의 거성 음절과 관련이 있음이 지적되었으나, 선중웨이는 잉여 표기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였으므로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거란어의 음조를 연구한 논문에서 오타케 마사미大竹昌巳(2024)는 잉여 표기가 나타나는 중국어 음절을 유형 별로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요대 중국어의 성조 체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밝혀냅니다. 거란소자의 잉여 표기는 중고 중국어에서 근고 중국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성조의 추이와 합류를 밝히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거란소자 잉여 표기의 예시. 오타케(2015:90)에서.

 

선중웨이(2012)는 거란소자의 잉여 표기가 중고음의 전탁 상성上聲과 차탁 입성 음절에 대해서도 적용된 것을 두고, 이 두 조형調形의 음절이 요대 중국어에서 거성에 합류했다고 논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옳지만, 잉여 표기가 중고음의 전탁 상성 및 차탁 입성 음절을 포함하는 거성 음절에 한정되지 않고, 실제로는 평성 음절과 전탁 입성 음절에도 유의미하게 나타난다는 문제점이 오타케(2024:94)에서 지적되었습니다.

 

오타케(2024:95)는 잉여 표기로 표기되는 중국어 음절을 정량적으로 총3군으로 나눕니다. 잉여 표기율이 10%를 넘어가는 제1군은 각종 거성, 전탁 상성, 차탁 입성으로 구성됩니다. 이는 당대 장안음을 반영하는 혜림慧琳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와 원대 대도음을 반영하는 《중주악부음운류편中州樂府音韻類編》의 성조 체계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중고음 전탁 상성 및 차탁 입성 음절의 거성 합류 양상과 일치합니다. 잉여 표기율 10% 미만의 제2군은 탁 평성 및 전탁 입성으로 구성됩니다. 이 역시 상기 당대음과 원대음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양 평성 음절 합류 양상과 일치합니다. 중고음 탁음 성모가 후에 청음에 합류하면서 본래 탁음 성모의 음성적 특징에 의해 상대적으로 낮은 조역調域으로 실현되던 것이 음운화되어, 청탁의 대립이 각각 고조와 저조(=음조와 양조)의 꼴로 옮겨가는 대립추이transphonologisation가 발생했는데, 따라서 제2군은 중고음의 탁 평성은 근고음의 양 평성으로, 또 북방 관화에서 전탁 입성이 양 평성에 합류한 사실과 합치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군은 잉여 표기가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는 청 평성, 차탁 상성, 청 입성, 청 상성입니다.

 

이러한 정량적 데이터는 요대 중국어의 성조 체계에서, 중고음의 청 평성과 탁 평성 음절, 청·차탁 상성과 전탁 상성 음절, 청 입성과 차탁 입성과 전탁 입성 음절이 각각 다른 조류에 속했다는 분석으로 귀결됩니다(오타케 2024:97). 달리 말하면, 요대 중국어에서 중고음의 평성, 상성, 입성의 각 성조가 중고음의 청탁에 따라 음조high register와 양조low register로 분열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중고음의 거성의 경우 모두 제1군에 속하기 때문에 거성의 음·양조 분열은 잉여 표기 데이터로부터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근고를 정의하는 기준

원대 대도음에서 이미 음·양조의 분화는 평성에서만 유지되었고 상·거성에서는 다시 합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거성과 같은 tone contour의 경우 저조와 고조의 대립은 북방 관화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과도기적 상태였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분석을 통해 그 과도기적 상태의 시작 지점을 요대 중국어에 놓을 수 있습니다. 후기 중고음을 반영했다고 여겨지는 《운경》은 청탁 대립이 남아 있고, 이는 곧 《운경》이 성조의 분합이 일어나기 전의 체계를 반영했음을 의미합니다. 근고 중국어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입성의 사성 합류, 전탁 성모의 청음화, 차탁 성모의 공명음화는 모두 당대 장안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만당晩唐 돈황敦煌 사음 자료나 요대 중국어 시기부터 확인됩니다. 그리고 예컨대 중고음의 전탁 상성, 즉 양 상성 음절의 거성화는 이미 혜림 《일체경음의》에서 확인되지만 전탁의 청음화와는 무관할 것입니다.

 

근고음적인 특징을 대체로 갖추었으면서 거란소자의 잉여 표기를 통해 성조의 과도기적 분합을 확인할 수 있는 요대 중국어는, 이제 자료의 부재로 인한 ‘과도기적인 무언가’라는 인식에서 탈피하여 근고 중국어의 기점으로 재편되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요대의 중국어 구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조기 관화’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제 초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요대 중국어의 음운체계는 충분히 근고적입니다.

 

  • 橋本進吉(1927)「國語音韻史の硏究」『橋本進吉博士著作集』六:3–186
  • 大竹昌巳(2015)「契丹小字文献における母音の長さの書き分け」『言語研究』148:81–102 
    • (2024)「契丹語の音調」『言語研究』165:85–110
  • 沈鍾偉(2012)〈契丹小字漢語音譯中的一個聲調現象〉《民族語文》2012(1):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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